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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고양이 Nov 07. 2021

돌봄일기 #11 – 천고마비

하늘은 높고 나는 살찌고 영혼은 마비되고

10월달


백신 2차 맞고 오랜만에 아팠으며 그 뒤로 자반증이 나타남. 이틀 만에 가라앉기 시작함. 백신 부작용은 아닌 듯 하나 몸 전체가 이상해진 느낌. 졸업 작품 초고를 냈으며 피드백을 받았다. 결과는 통과지만 기쁘지 않다. 당연하지, 쓰는 내내 재미가 없는 글이었으니.

적당히 기쁘고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끔찍한 한 달.









             

천고마비




이 말이 중국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만리장성을 쌓아도 쳐들어올 놈은 계속 쳐들어왔다. 중국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이들 중 하나는 흉노족으로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을 하는 부족이었다. 그들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 중국의 식량을 약탈함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고 짐승의 살이 오르는 시기니 풍족한 계절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흉노족이 처 들어올지 알 수 없는 불안한 계절이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천고마비)가 오니 두렵다’며 푸념을 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천고마비’가 유래했다고 한다.

마치 고구려에서는 까마귀가 길조이나 중국에서는 흉조인 것과 같은 의미이려나.


어쨌든 폐를 짓누를 듯이 내려왔던 하늘이 갑자기 높아지고 단풍이 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은 여전히 덥지만 출퇴근길이 제법 쌀쌀해졌다.  

    

나는 끝없는 식욕을 느끼고 머리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살은 내가찌고 영혼이 마비되고     

가끔 생각한다. 내가 전생에 곰이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잡식으로 많이 먹어치울 리가 없다. 먹는 양을 줄이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두달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냥 먹고 싶으면 배달앱을 키고 시켰다. 전에는 불족발을 시켜 일주일 내내 밥반찬처럼 곁들여 먹었는데 삼일만에 다 먹었다. 뭔가 이상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사실 배는 부르다. 목구멍이 넓어진 기분이다. 무엇이든지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다. 꼭 공포게임 <리틀나이트메어>의 MAW가 된 기분이다. 손님들을 집어삼킬 때 마다 MAW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친 듯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삼키는 손님들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점점 심한 굶주림을 느끼는 ‘식스’(게임의 주인공)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예전에 배고픔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전에도 말했었나, 배는 고프고 잇몸은 간지럽고 먹을 것은 없고, 룸메들은 전부 담요로 가림막을 쳐 놓은 채 공부를 하고 있고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고. 결국 베게에 머리를 박고 좀 울다가 화장실로 가서 팔뚝을 깨물었다. 이가 근질근질했다. 그렇다고 화가 나서 상처가 남는 자해는 할 수 없으니 뭐라도 문 거다. 곰이 연어를 잡아 산채로 물어뜯듯 급하게 글을 다 쓰고 나서야 잇몸의 근질거림이 가라앉았다. 그 소설을 쓰고 나서 학교에서 상담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멀쩡해지고 난 뒤였으니,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물론 사랑하는 선배님들과 동기들과 교수님들의 보살핌이 있었으나 나는 계속 허기를 느끼고 잇몸이 근질거렸다. 원초적인 욕구만 살아나고, 뭔가를 생각하려고 하면 멍하고. 그래, 영혼이 마비되고 있었다.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가끔 내가 고도로 발달된 기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무한한 알고리즘의 조합으로 황당한 생각을 생산하는 기계. 람보르기니보다 가성비가 좋지 않은 기계. 어쨌든 내게도 영혼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10월 한 달 동안 마비되고 있었다.


핫식스를 몇 캔 씩 마신 것 마냥 멍하다. 어떻게든 텐션을 올려서 저들에게 웃음을 주고 적당히 재치 있게 넘겨주고 해야 하는 게, 그럴 수 없다. 머리가 돌이 된 것 같다. 글을 한 줄 쓰는 것도 힘들다. 졸업 작품 초고는 문장 하나만 쓰고 한 달을 노려보다 결국 제출 이틀 전에 싹 갈아엎었다. 머리가 돌이 되었으니 행동도 굼떠지고, 궁극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재미있어야 뭐든 신나서 하는데 재미가 없으니 머리가 돌아갈 리가 있나. 상상도, 글도, 다 재미없다. 노래를 들어도 그냥 그렇다. 유일하게 기쁨이 되는 일은 먹는 것이다. 그렇다고 풍족하게 먹느냐? 기숙사생이 뭘 어떻게 풍족하게 먹겠다. 배달음식 시켜놓고 텅 빈 잔고를 붙잡고 우는 수밖에. 그냥 정수기 물이나 원샷하는 거다. 그리고 다시 근질거리는 잇몸과 간지러운 목구멍을 붙잡고 끝없이 먹고 싶어하고, 속으로 욕하고, 팔뚝을 물려다 입술만 잘근잘근 물기를 반복하고. 단조롭고 끔찍한 일과의 지속이다.




웃긴 건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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