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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고양이 Jun 06. 2021

돌봄일기#3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돌봄일기 3주차

상처 없음. 약간의 탈력감. 식사 매 끼니 잘 챙겨먹음.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망막박리를 알게 되고 눈 건강에 대한 불안이 다시 생김. 기절잠.     


     




세상이 멸망한다면?

시뮬레이션이 습관이라 늘 상황을 정해두고 상상한다. 극한의 상황 설정은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낸다. 어느 날 세상이 멸망한다면? 드라마처럼 멸망이 현관문을 걷어차고 들어온다면? 

     

난 멸망의 멱살을 잡고 맛집 투어를 갈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계 맛집 투어도 가겠지.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음식을 잘 먹는 건 아니다. 당연히 편식을 한다. 고기와 야채를 두고 먹으라하면 당연히 고기만 먹을 것이다. 차갑고 눅눅한 것은 먹지 않고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은 소스류는 기피한다. 전복죽과 소고기죽을 제외하고 죽은 일절 먹지 않는다. 아파도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죽은 맛없으니까. 

내 편식의 기준, ‘맛없는 것은 먹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한국의 아이들은 그렇듯이(어쩌면 전 세계의 아이들도 그러하듯) 편식은 죄악이라고 잔소리를 들어왔다. 누가 밥을 이렇게 남기래(제가요), 아프리카에서는 이것도 못 먹어서 굶어죽고 있다고(아프리카 사람들도 어릴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못 먹어서 굶어죽는단 소리를 들었단다), 안 먹을 거면 나가. 대충 레파토리는 이랬다. 한번은 미역국이 먹기 싫었다. 엄마는 다 먹지 않으면 TV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부엌에서 ‘딩동댕 유치원’을 보고 싶어 울었다. 밥을 만 미역국을 다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때 무척이나 서러웠다. 편식으로 엄마와 실랑이 할 때면 나는 끝까지 안 먹다가 밖으로 쫓겨나고 슬쩍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불굴의 의지를 가진 우리 엄마는 어떻게든 날 먹였다. 그렇게 먹기 싫었던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잘 먹기 시작했다. 잘 먹으면 엄마아빠는 물론이고 주변 어른들이 어른취급을 해줬었다. 맛이 하나도 없는 삶은 브로콜리를 초장에 찍어먹으면 칭찬이 쏟아졌다. 급식실에서 친구들 김치를 대신 먹어주면 친구들이 잘 대해줬다. 잔반을 남기면 무서운 6학년 언니오빠들이 다 먹을 때까지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들이 나를 잔반처리용으로 보는 줄도 모르고 김치나 밑반찬을 먹어줬었다. 멍청한 건 나도 안다. 그땐 어렸으니까.     


어쨌든 외모에 관심이 많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도 다이어트나 해볼까 했지만, 이미 음식을 흡입하게 된 목구멍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가 불러도 앞에 음식이 있으면 생각 없이 먹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의 나에게 음식 빼곤 낙이 없었다. 잘하는 게 먹는 것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먹는 건 내 유일한 기쁨이고 분노를 다독이는 행위다. 

이만큼의 기쁨을 느끼고 싶으니깐, 이만큼의 분노를 참았으니까 맛있는 거 먹어야지. 음식은 자극적일수록 좋다. 다음날 변기를 붙잡고 회개를 하는 한이 있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어야 한다. 배를 붙잡고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할 만큼 불편하더라도 속이 터지게 먹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풀이를 할 곳이 자해밖에 없다. 어쩌면 그렇게 먹어대면서 자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에 대해 혐오감이 들어 굶어죽어야겠단 생각으로 홧김에 며칠 굶은 적 있었다.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며칠 동안 음식을 끊은 것으로 얻은 것은 배고픔을 넘어선 굶주림은 생각보다 무섭다는 교훈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잘 해왔고 잘 할 수 있는 건 ‘먹는 행위’밖에 없었다. 내세울게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비참했다. 


유독 자신감이 없었을 때 배고픔에 대해 단편을 쓴 적이 있다. 살아있는 걸 먹으려다 제 살점을 물어뜯게 된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의 한 달 동안 울면서 잠드는 와중 배까지 고프니 서러웠다. 자해를 하고 싶은데 날이 서늘하기 전이라 반팔을 입었을 때 표시가 날까 칼을 대지도 못했다. 베개에 머리를 박고 울다가 생각해낸 방법이 팔뚝을 무는 것이었다. 몇 번 물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지만 잇몸에 닿는 살의 촉감이 이상해 구역질이 났다. 그걸 모티브로 썼다. 물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쓴 소설은 좋은 합평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쓴 뒤부터 한동안은 팔뚝을 물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배고픔을 느끼고 악착같이 먹으려드는 몸이 싫다. 싫은 만큼 먹는 것을 사랑한다. 오로지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해 씹고, 삼켜서 속을 채우는 행위. 언제쯤이면 새 모이만큼 먹고도 맛있게 잘 먹었다며 배를 두드릴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실컷 먹은 날 밤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맛있다는 생각만 하고 먹을 수 있을까.


이렇게 쓰면서 닭가슴살 한 덩이를 씹는다. 암만 싫어도 먹고는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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