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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고양이 Jun 13. 2021

돌봄일기#4-1

내가 자해를 한 이유

돌봄일기 4주차

상처 없음. 아몬드 초콜릿에 미쳐있음.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어 잇몸이 근질거림. 간간이 칩거모드로 돌입하고 싶으나 자제중. 종강만 바라보며 우울감 달래는 중.




*자해 이야기 있음





       

저번 주 <알쓸범잡>에서 ‘자해’와 ‘자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 부분을 보다가 밥 먹다 말고 한 30분을 펑펑 울었는데, 오늘은 자해에 대해 기록을 남기려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 스스로 왜 자해를 하는지 이유를 정리하기 위해서고, 자해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기 위함이며, 자해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에게 ‘자해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마침, 상담 도중 내가 왜 자해를 했는지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기도 했다.

 

중학교 때 처음 걸렸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다가 들킨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데 미숙했다. ‘이거 뭐냐’는 물음에 ‘그냥’이라는 되도 않은 답을 했고, 질문이 쏟아졌다. 질문의 시작은 ‘왜’였고, 끝은 ‘무엇’이었다. 왜 했니, 뭐가 문제니. 그땐 추궁을 피하려고 아무 말이나 했다. 대충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해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생각들을 떠올리며 말을 지어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간의 실책으로 자해를 한 거야. 그때 화가 많이 났었어. 분이 안 풀려서. 내가 아무나 잡고 찔러 죽일 순 없잖아. 남을 분석하듯이 변명을 늘어놓았고 그건 꽤 잘 먹혔다. 하지만 자해를 하고 걸리는 게 반복되면서 변명은 잘 먹히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누가 자해를 하는 순간 ‘나는 **하니까 자해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그딴 거 없다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하게 볼까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난 왜 그럴까. 중고등학교 시간에 그렇게 귀에 닳도록 자살과 자해는 나쁜, 혹은 좋지 못 한 거라고 배웠는데 왜 자살을 생각하고 자해를 할까.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     


처음 생각해낸 이유는 외부에 존재했다. 

이 이유를 변명에 많이 써먹었다. 화가 나면 꽥 소리를 지르고 싶고 울고 싶으면 소리내서 울고 싶은데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게 속에서 쌓이면 어느 순간에 분노가 가득 차오르고, 향할 곳을 잃은 분노는 결국 터져서 자해를 한다. 이게 주로 내가 내민 변명이었다. 이 변명은 나름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변명을 듣는 상대가 끝없이 해결방안을 제시해준다는 단점이 있다.  

    


왜 굳이 스스로 아프게 하는 거야? 인형을 마구 때리던가, 신문지를 찢던가. 맛있는 걸 먹고 기분을 풀 수 없어? 잠시 참아보는 거야. 대부분은 너처럼 그러지 않아. 아주 괴로운 사람들만 그러는 거야. 

     


그게 되었으면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겠지. 건강한 분노의 표출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건가 싶어 여러 취미에 도전해 본 적도 있다. 프랑스 자수, 십자수, 캘리그라피, 기타, 글쓰기. 바늘에 찔리면 짜증났고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더 화가 났다. 글을 쓴다고 풀릴 화였으면 생각만 했어도 됐다. 뭐 하나 시원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어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첫 상담에서는 내 머릿속의 생각을 끊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결론이 나왔다. 조그만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는, 최악을 상상하는 나의 망상을 끊어내기.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무작정 걷기, 맛있는 것 먹기, 뮤지컬이나 연극 등 문화생활하기, 샤워하기, 노래 부르기, 운동하기 등등. 의욕에 가득 찬 시도는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갔다.      


의문이 들었다. 의지박약인가? 내가 나약한 건가?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가? 의문은 의심으로 커졌다. 내가 정말 괴로운가? 내가 자해를 할 만큼 절망스러운 상황인가?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말 할 자격이 있나? 순 핑계는 아닐까? 그럼 뭘 위한 핑계인가? 외부로 겨냥한 원인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생각해봤다. 나는 왜 자해를 하는 걸까.     








자해를 하면 편안하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편하기 위해서.     


시몬스나 에이스 침대에서 잠을 자는 그런 편안함은 아니지만, 심약한 내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안정감으로 치자면 브랜드 침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신체적인 통증이 존재하지만 통증이 짙어질수록 정신적으로는 편하다. 자해를 하기 전까지 불편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는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다양한 말을 하는 생각들을 잠재우고 아픈 통증에만 집중할 수 있다.    

 

통증이 없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아니냐고? 대충 상처를 수습한답시고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면 화가 가라앉는다. 수습할 필요가 없는 상처면 얼마나 아픈지, 이 상처가 얼마나 갈지 살피느라 꽤 침착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나를 미치게 만드는 생각과 고통은 줄어든 상태가 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의 끝을 달리는 최악의 상황은 넘긴 것이다. 그 순간만 따져본다면 자해는 나를 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는 행위다.     


변명이라면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 나면 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데, 온 몸이 긴장으로 곤두설 때 합리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최대 3분은 있어야한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화가 나면 그건 나 스스로가 화내기로 선택한 거라고. 참으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건 기분이 아주 좋을 때나 가정해볼만한 생각이다. 괴로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나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생각해보라. 내 몸을 해하기만 한다면 나를 괴롭고 미치게 만드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데, 안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이렇게 원인을 분석하는 글을 적고 있는 상태의 나는 자해를 할 이유도, 생각도 없으며 누군가 권한다면 미쳤냐고 머리를 후려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하고, 도움을 청할 이 하나 없고,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을 때 자해는 내게 유혹적인 수단으로 다가왔다.     


자해는 미쳐 날뛰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고심의 결과다. 자해를 하기 까지 오랜 시간동안 곱씹고, 고민하고, 망설인다. 자해는 내게 성급히 내린 결과도, 실수도, 최악도 차악도 아니다.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럼 나는 왜 자해를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그런 식으로 나의 편함을 추구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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