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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이#9 오페어 Au-pair 생활

오페어로 일 년

by Linda

나는 독일에서 두 종류의 비자를 받은 경험이 있다. 반년은 학생비자, 1년은 오페어비자.

다들 내가 독일에서 오페어로 있었다고 하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응? 그게 뭐야?" 또는 "아... 진짜? 괜찮았어?"


#오페어 = 홈스테이?


오페어와 홈스테이의 비슷한 점은 현지 가정에서 지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오페어는 그 가정에서 유모와 같이 일을 해주고 급여를 받는다.

일반적인 풀타임 유모와 다른 점은 비교적 자유시간이 많아서 어학원을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사실상 정당하게 일을 하면서 어학을 공부할 수 있는 어학비자이다. 실제 취지도 현지의 문화를 배우며 어학실력을 쌓고 호스트 가정은 필요한 인력을 제공받을 수 있다. 합리적인 가격에 유모를 구하는 게 어려운 독일 사정상 이 제도를 잘만 이용하면 서로에게 윈윈이다.


#오페어 가정 찾기

나는 이 제도에 대해 독일에 있을 때 알게 되었고, 독일 친구가 알려줘서 찾아보게 되었다.

독일친구: "대략 어학비자 같은 건데, 독일 가정에서 지내면서 독일어 배우는 거야."

나: "오 그래? 좋은 제도네!"(당시 나는 홈스테이 같은 거라 생각했다..)


Au pair 사이트에 여러 구인광고 중 하나를 골라 컨텍했다. 못하는 독일어로 겨우겨우 몇 문장 적어서 보냈다. 주인집(Gastfamilie)에서 답장이 왔을 때 너무 기뻤고 친구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 아주머니(Gastmutter)는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약속을 잡고 쾰른행 기차에 올랐다. 진짜 그때 스마트 폰도 없는데 어떻게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아주머니가 아마도 쾰른기차역에 데리러 와주셨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주머니가 짧은 본인소개와 집을 보여주시고, 대충 내 소개랑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으면서 근처 공원을 걸으며 편안한 면접(?)이 이루어졌다.

사실 내 독일어가 매우 어설퍼서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 학기가 끝나고 언제 쾰른으로 이사 갈 수 있는지 등을 손짓발짓 및 아는 단어 총동원해서 설명했다.

(구글 번역기도 없었던 그 시절 나 스스로가 진짜 대단하다...)


#오페어의 실제 생활은?

학기가 끝나고 함께 온 동기 및 선배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홀로 남아 기숙사에서 쾰른으로 갈 준비를 했다. 거기서 알게 된 외국인 대학친구들과도 작별인사를 하고 드디어 무더운 여름 쾰른에서의 오페어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다 같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아이들 도시락 싸는 것을 도와드리고 위층으로 가서 아이들이 잘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나도 나갈 준비를 대략 마치고 막내 손을 잡고 함께 유치원까지 걸어갔다.

막내를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어학원으로 향했다. 첫날이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멕시코에서 온 친구와 친해졌다. 어학원이 끝나고는 곧장 집으로 왔고, 리자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왔다.

옆집에는 아이들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셔서 애들은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거나 아이들이 친구들과 노는 동안 같이 있어주었다. 오후 세시쯤이면 아이들 엄마가 집에 왔다. 그러면 나는 곧장 내방으로 가서 어학원에서 배운 걸 복습하거나 내 할 일을 했다. 가끔 약속이 있어 나가기도 했다.

사실 아이들만 봐주는 거라서 아주머니가 집안일은(Hausarbeit/Haushalt)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함께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뒷정리를 함께 하거나 아이들 빨래 정리도 도와드렸다. 항상 고맙다고 하셨다.

의사 셨던 아주머니는 가끔 구급차에 같이 나가는 의사로 파트타임 일도 하셨다. 싱글맘이셨던 아주머니를 대신해 그날은 애들을 재우는 일도 했다. (추가 수당도 주셨다)


둘 다 각자의 방이 있었기에 각자 방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쉽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날들이 있는데 1층 거실에서 2층까지 데려가는 길이 엄청나게 힘들었고, 티비를 못 보게 했다고 그렇게 서럽게 울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내 책임감에 너무 충실해서 아주머니의 말대로 9시에 무조건 애들을 재워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다. 그때 내가 좀 더 편하게 대해줬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나의 오페어 생활은 너무나 순탄했다. 가끔 어학원에서 다른 오페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안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던지, 대우가 부당하다던지 여러 가지 불만이 들려왔다. 나는 그에 비하면 자유시간도 많고 집에 아주머니와 아이들 뿐이라 매우 편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파트타임일을 많이 해본 경험으로 이 정도의 일은 그리 고되지 않았다. 제일 어려운 건 역시나 아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 나의 짧은 독일어로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초딩한테 무시당하는 서러움 정도?


주말은 온전히 내 시간이라서 아주머니도 터치하지 않으셨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 가끔 막내가 신기한 듯 쳐다보며 내 무릎에 앉아 경청했다. 5살짜리 꼬맹이가 "안녕하세요"를 따라 하면서 말이다.

St.Martin day, Karnival, 크리스마스, 새해 행사(Silvester) 등 온갖 가족행사도 함께 했다.


#오페어비자 Au-pair Visum

아주머니가 딱 한번 나에게 화 내신 적이 있는데 바로 비자 문제였다. 뭐든 미리 예약을(Termin) 해야 하는 독일에서 비자연장신청을 위해 구청에 가서 일정을 미리 잡아 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주머니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시면서 지금 당장 가서 하라고 뭐라 하셨다.

사실 알고 있었고 비자 심사기간 중에 받을 수 있는 임시비자 같은 걸 받으면 된다고 독일어로 말하고 싶었는데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도 당장에 내가 없으면 아이들 봐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걱정에 감적이 격해지신 듯한다.

집을 나와서 걷는데 괜히 나와서 눈물이 났다. 아주잠깐. 당시 오페어비자는 6개월마다 연장신청을 해야 하고 최대 1년까지 가능하다. 비자 연장신청을 했고, 문제없이 지나갔다.


참고로 오페어 비자는 18세 ~26세 사이인 사람만 신청가능하고, 보통은 아이들을 보는 일이라 여자들이 지원을 많이 하지만 남자도 신청할 수 있다. 나이가 어린 여자들이 신청하기 때문에 das Au-pair-Mädchen (오페어 girl)이라고도 한다.

* 한국에서도 오페어 비자를 미리 신청하고 갈 수 있다.

https://seoul.diplo.de/kr-ko/service/visa-einreise/1891034-1891034


#오페어 생활 끝... 그 이후!

그렇게 1년을 지내고는 아주머니는 나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래도 1년간 정이 많이 들었는지 그렇게 까지 해주셨다.

당돌하고 약간은 엉뚱하기도 했을 나를 믿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그렇게 1년 반의 독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그 뒤로도 계속 독일 앓이를 하며 독일과 관련된 일도 하고 인연을 만들어 나가며 지내고 있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다시 독일에서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겁 없던 24살 오페어 시절이 그리워지는 건 여전하다.


올해 드디어 독일 가족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했다. 너무 기대되고 누구보다 잘해드리고 싶다...!


- 오늘의 야기는 여기까지! -


ein Jahr als Au-pair-Mädchen
[아인 야 알스 오페어 멛헨]
오페어로 일 년

☞ein Jahr: 1년
☞als: ~로서 (직업 앞에)
☞das Au-pair-Mädchen : 오페어 girl

☞ die Gastfamilie: 호스트가정, 주인집
☞ die Gastmutter: 주인집 아주머니
☞ der Gastvater: 주인집 아저씨
☞ Visum beantragen: 비자를 신청하다
☞ die Hausarbeit : 집안일 (집이라는 단어와 일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이다)
☞ der Termin: 일정, 약속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Termin! 어딜 가든 미리 일정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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