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 대성당이 완공되면, 세상이 망하는 날
모든 것이 새롭고 신났던 대학생 시절 나는 주말마다 기숙사를 뛰쳐나갔다. 엄청난 유럽여행을 꿈꿨다기 보다는 갈 수 있는 곳부터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독일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내가 처음 살았던 도시인 마인츠에는 마인츠 성당이 유명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광 겸 갈 일이 종종 생겼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절, 교회나 성당에 꾸준히 갈일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여행 삼아 갈 수있는 곳이 명동성당 그리고 유명한 사찰 이외에는 교회의 건축양식을 보거나 교회 예배당의 고요함을 즐길만한 곳이 없기에 독일에서 교회를 가는 것도 나에게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독일에서 교회나 성당에만 들어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잠시 그 분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복잡한 생각이 올라오다가 이내 사라졌다.
라인강을 접하고 있는 마인츠는 조용하고 한적한 도시이다. 이곳은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도시이자, 중세의 중요한 정치 종교 중심지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종교적 의미 보다는 나의 산책코스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이따금씩 산책 삼아 성당 예배당에 가서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앉아 있다가, 아담한 구시가지를 지나 라인강변 산책로까지 둘러보고 돌아오곤 했다.
마인츠 사람들(Mainzer)은 성당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해보면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이지만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마인츠 성당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당시 나의 부족한 독일어 실력 탓에 더 많은 마인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마인츠 중앙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인츠 대성당을 만날 수 있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외벽은 햇살을 받으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내부는 은은한 조명 아래 고요함 속에 편안함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차례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기의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바로크 이 부분을 찾으며 성당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마인츠 대성당은 단지 종교의 공간을 넘어서, 수많은 황제들의 대관식이 이루어진 정치적 공간이었다고 한다.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것은 비단 근현대사회의 현상이 아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역사적 사건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로 1시간 반. 만하임을 거쳐 작은 도시 보름스에 도착하면, 고요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반나절이 조금 넘는 Worms 여행이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살짝 어두운 듯한 기차역의 분위기는 보름스 대성당과 비슷했고, 기차역에서 쭉 뻗어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양쪽의 가로수가 만들어준 그늘로 뒤덮인 길이 있었고, 그 길에 있는 카페 야외자리에서 치즈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며 옆테이블의 이야기를 유연히 엿들었는데.. 고부갈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대충 말씀하고 계신 할머니가 며느리(Schwiegertochter)에 대해 매우 화가 나신 듯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아! 내가 좀 알아들었네!?'라는 기쁨과 '역시 고부갈등은 독일에도...' 라는 두 가지 깨달음(?) 때문이다.
그리고 아시아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도시에 성당구경하겠다고 간 나를 매우 신기하게 쳐다보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까지(기분나쁘진 않았다) 선명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특별히 인상 깊었던 보름스 성당의 모습은 한적한 길을 따라 걸어간 곳의 끝에 갑자기 나타난 웅장함이었다. 외부뿐만이 아니라 내부까지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실제 면적만 봤을 때는 보름스 성당이 마인츠성당보다 크지 않지만, 구조상의 차이 때문인지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은 찾는 사람도, 거주민(8,500명 정도)도 많지 않은 도시이지만, 종교개혁과 유대인공동체에 대한 역사도 깊은 장소로 유명하다.
보름스 대성당은 12세기 초, 약 1130년경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추고 있다. 외형은 다른 대성당에 비해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네 개의 둥근 탑과 두 개의 돔형 지붕이 만들어내는 실루엣은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이곳은 단지 건축물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521년, 마르틴 루터는 이 대성당 근처에서 열렸던 '보름스 회의'에 참석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종교개혁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루터가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Here I stand)”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또한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했던 곳으로, 성당 주변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묘지도 남아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열차 ICE를 타고 1시간 정도만 달리면, 어느덧 기차 창밖으로 거대한 고딕 첨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인츠에 사는 동안 쾰른에 갈 일이 두 번 있었는데, 기차에서부터 웅장한 쾰른 돔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쾰른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말문이 막힐 정도로 웅장한 쾰른 대성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쾰른 성당은 쾰른 사람들(Kölner)에게 자부심과 같은 존재였다. 시내중심지와 멀지 않아서 항상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카니발 축제기간에 성당 앞에서 코스튬 입고 사진을 안 찍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쾰른대성당의 뒷모습도 정말 인상적이었다.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깍아진 석조 건물 기술에 감탄 했다.
고딕 양식의 정점을 보여주는 두 개의 첨탑은 157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딕 교회 중 하나다. 내부에 들어서면 하늘로 치솟은 리브 볼트(Rib Vault)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만들어내는 성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된다. 고딕양식은 하늘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을 뾰족한 첨탑과 예배당 내부의 엄청난 높이로 표현했고, 로마네스크 양식에 비해 빛을 많이 들여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쾰른 대성당은 단순한 교회 건물이 아니다. 1248년, 동방박사*의 유해를 보관할 황금 성궤(Dreikönigsschrein)를 위한 성스러운 장소로 건설이 시작되었고, 약 6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1880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중간에 수세기 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고, 재정과 기술적 한계로 인해 방치되었지만, 19세기 독일 통일 분위기 속에서 "민족의 상징"으로 다시 공사가 재개됐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쾰른 시내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지만, 대성당은 기적적으로 구조적인 붕괴를 피하며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동방박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후 베들레헴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의 박사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정확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교회(Kirche)와 대성당(Dom)의 차이!
교회(Kirche)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의미를 가진 곳이고, 대성당(Dom)은 역사적의미와 건축적 특징과 중요성을 가진곳을 가리킨다.
-오늘의 독일 이야기는 여기까지-
„Wenn der Dom fertig ist, geht die Welt unter“
[벤 데어 돔 페어티히 이스트, 게트 디 벨트 운터]
(쾰른) 대성당이 완공되면, 세상이 망하는 날.
☞ 2차 세계대전 이 후 계속되는 쾰른 대성당의 보수공사에,
쾰른 사람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 Wenn 만약
☞ der Dom 대성당
☞ ist 이다 (영어의 is)
☞ geht ...unter : 가라앉다 침몰하다
**untergehen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이면 unter와 gehen이 분리된다.
☞ die Welt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