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지난 나의 독일 살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독일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독일은 한국처럼 빠르게 바뀌지는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발견한 독일인들의 아날로그 방식에 대해 몇 가지 나열해 보자면..
사진: Unsplash의Kelly Sikkema
#1. 휴대폰 없어요 전공 교수님이셨던 독일 원어민 교수님의 방은 그야말로 아날로그 그 자체였다. 촘촘히 쌓여있는 서류들 책으로 가득한 책장. 꽂을 자리가 모자라 책장의 모든 틈새까지 다 채워버린 책들.
더 충격적인 건 교수님은 한국에 사신지 엄청 오래되셨지만 휴대폰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모든 일을 이메일로 처리하시고 구두로 약속을 잡고 그때 나타나야 한다. 안 그러면 다시 약속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녔을 때에도 벌써 DVD는 거의 기억 속 어딘가로 사라져 간 유물이 되어갔지만 교수님은 꿋꿋이 DVD로 독일 영화를 보여주셨다. 뭐 어차피 가지고 있으니 사용하시는 거겠지만 요즘 학생들이 보면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보는 기분 일 것 같다.
더 충격인 건 이걸 다른 독일인들에게 얘기했을 때 오는 대답 "독일에 나이 좀 있으신 분들 중에 그런 분들 많아 ~" 그럴 수 있다며 넘겼다...
#2. 서류는 바인더에 착착 독일에 지내던 시절 비자를 갱신하러 구청에 갔다. 정확히는 비자갱신을 기다리는 동안 기간이 지나는 걸 대비해서 받는 임시비자 같은 게 있었다. 어찌 되었든 독일에서 관공서에 간다는 것은 정말 신경 쓰이고 두려운 일이었다.
대기하는 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 앉아 기다렸다.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아 보이는 직원이 문을 열고 내 이름을 이상하게 발음하며 불렀다.
두려웠지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병풍처럼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바인더, 서류철이었다. 나도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잘하진 못함)이라 이렇게 정리가 잘되어있는 서류를 보면 마음이 편안했다. 수많은 서류 중에 기계처럼 정확한 바인더를 찾아 필요한 곳을 찾아내 착착 펴내고 서류를 꺼내는 모습이 그저 신기해 보여 눈을 뗄 수 없었다.
#3. 집에서 공과금영수증도 바인더에 착착 독일가족들과 함께 살 때 주인아주머니와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머니가 공과금 서류가 어쩌고 저쩌고 하시면서 바인더를 꺼내셨다.... 집에서도 공과금 낸 영수증을 바인더에!? 당시 나로서는 또 한 번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바인더는 학교나 회사에서만 쓰는 거 아닌가?
사실 서재라는 곳이 존재하기 때문에 책장이 있고 또 거기에 서류들을 바인더에 곱게 꽂아 보관할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바인더를 사서 매번 거기에 모아두는 그 습관이 정말 놀라웠다.
나는 이 아주머니만 그런 줄 알았는데 독일회사에 다닐 때 재택근무하는 직원과 회의를 하는데 몇몇 직원들은 배경을 가리지 않아 그 직원들 집이 다 보였는데 거기에도... 수많은 바인더들이 꽂혀 있었다.
독일사람들이 잘 쓰는 바인더는 D링 바인더를 사서 안에 투명한 속지를 끼우는 형태의 바인더를 많이 쓴다. 그리고 앞부분에 꺼내기 쉬우라고 만든 동그란 부분은 손가락을 넣어 딱 잡아 끄집어 낸다.
그리고 대부분 검은색 바인더를 사용한다. 꼭 약속한 듯. 그 주인아주머니는 쾰른 분이고 독일 직원들은 남부 쪽 사람들인데.. 모르는 사람들인데.. 왜 이리 비슷한 거지? 약간 소름이 돋았다...
바로 이 바인더!
#4. 편지를 써요
독일의 복지 수준이 좋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다 챙겨주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서류준비가 필요하다. 한 친구의 친구가 실직을 해서 실업급여를 받고 있었고, 구직기간이 길어져 더 실업급여 연장을 위해 편지를 쓴다고 했다. 진짜 손편지를...... 나는 놀라서 물었다.
나: 진짜 손 편지를 쓴다고?
친구: 그래 편지를 써서 설명을 해야지
나: 아 그렇긴 한데 이메일 쓰면 되잖아
친구: 그래도 되긴 하지
편지를 쓰는 것도 놀라웠고, 본인의 상황을 설명해서 실업급여 연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무조건 딱 잘라서 정해진 기간 동안만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끝일 줄 알았는데 개개인의 능력차를 고려해 실직기간이 길어지면 사정을 참작해 주다니. 물론 친구말로는 이것도 케바케이고 담당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암튼 이것 말고도 온갖 클레임도 다 공기관에 이메일을 쓰거나 실제 편지(손편지, 혹은 프린트한)를 보낸다.
그리고 은행, 관공서 등 많은 곳에서 이메일보다는 중요한 내용은 실제 우편으로 보낸다.
#5. 열쇠
현관열쇠, 아래층 공동현관 열쇠, 자전거 자물쇠 열쇠, 차키, 우체통 열쇠, 창고열쇠, 사무실 열쇠, 사무실의 서랍열쇠... 아직도 묵직한 열쇠고리 그리고 목걸이처럼 긴 줄이 달린 열쇠고리(Schlüsselanhänger)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2년 전 독일친구네 집을 방문했을 때도 어김없이 보조열쇠하나를 받았다. 지내는 동안 필요할 거라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공유하는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보다는 안전한 것 같지만 참 다시 옛날로 돌아가 열쇠를 들고 다니라고 하면 적응하는데 한참은 걸릴 것 같다.
요즘엔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되었지만 아직도 팩스를 자주 이용하고 우편이 애용되고 있다. 모든 일에 서류가 꼭 따라붙는 경우가 많으니 자연스럽게 바인더를 사용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독일은 무작정 살고 싶다고 쉽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 것 같다. 꼼꼼하지 않아도 꼼꼼해질 마음가짐이라도 하고 가야 한다.
20대 초반에 독일에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았던 것도 그나마 대학교의 테두리에 있었고 (대학교 가도 작성할 서류가 엄청남) 독일가정에 살았기에 주인아주머니가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대단하고 엄청난 서류더미들이다. 이런 기록의 달인들이 있기에 많은 역사가 잘 보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게 다 디지털화된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아날로그로 남아있는다고 해서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독일의 디지털화는 천천히 받아들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독일 이야기는 여기까지-
Ordnung ist das halbe Leben [오르'드'눙 이스트 다스 할베 레벤] : 질서는 인생의 절반이다.
die Ordnung 질서, 규율 *Alles in Ordnung? : '질서를 되찾았냐'-> 괜찮아?라는 의미로 쓰인다. halb 반 das Leben 인생, 삶
der Ordner 서류철 der Papierkram 서류더미 der Schlüsselanhänger 열쇠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