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수뜨라 2장 21절›
요즘 사촌동생을 포함해 90년대생 지인들의 결혼 러쉬다. 어느새, 축하하는 마음 한켠에 괜히 걱정도, 응원도 함께 생기는 그런 경력(?)이 되었다 ㅎㅎ 늘 또래의 친구로서 참석하던 결혼식이었는데, 엊그제는 60대 정토회 부부 도반님들의 자제 결혼식에 다녀왔다. 부모의 지인으로서 참석하는 자리는 묘하게 달랐는데, 좀더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2013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조금은 다르게 살았을까.
그때 붓다의 법이든 요가수뜨라든, 마음의 작용과 세상의 법칙을 조금 배워놨더라면 티격태격하는 시행착오를 덜 겪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가수뜨라는 상키아 철학의 이원론을 바탕으로, 순수의식인 뿌루샤와 물질근원인 쁘라끄리띠의 세계를 설명한다. 번뇌의 원인은 이 둘이 서로 들러붙는 데 있고, 물질근원 쁘라끄리띠의 목적은 순수의식 뿌루샤를 비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모든 거친 현상과 마음의 거칠거나 미세한 작용들은 마치 영사기에 비춰지는 영상과 같다. 이 상들이 비춰지는 이유는, 그 배후에 광원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영상을 보는 경험과 광원을 분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라고 이해했다.
환원해 올라가 현상의 근원을 알게 해준 이 모든 경험들에 대해 감사함이 인다. 지나고 보니 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몸뚱아리, 이 생각과 기억을 넘어선 존재라는 것을 체득해가니 더없이 든든하다. (더 크다거나 초월적이라는 표현은 굳이 쓰고 싶지 않다)
언젠가 이강언 선생님께 “영적이라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의 해주신 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모든 여정의 것’을 영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 맞네, 바로 그거지.’
영혼이나 귀신, 어떤 기감을 느끼는 이야기였다면 아마 실망했을 것이다. 착하게 살아라, 일해라 절해라(이래라 저래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나 도덕, 관습적 설명이 아닌 철저하게 물질과 마음의 특성을 해체해 전지적 관점(사실대로 나열하여 스스로 선택해가도록)으로 씌여진 경전이자 수행 지침서, 요가수뜨라.
‘느낌적 느낌’ 같은 모호함 없이 배우고 있어 너무 재미있다.
#다좋은세상 #내게일어난일은모두좋은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