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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라로 Oct 27. 2024

스위스에서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다

스위스에서 늦깎이 대학원생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런던에서 일할 때도 몇 번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지만,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버겁게 느껴졌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친정과 시댁의 도움 없이 타국에서 육아에 전념하느라 그야말로 서바이벌 모드로 살아왔던 몇 년이었다. 바쁜 남편을 두고 혼자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그 몇 년 동안 나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스위스에 오고 어느 정도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잊고 있던 대학원 공부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조금씩 여유가 생길 때가 공부할 때가 아닐까’라는 생각은 어느새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더 이상은 미루지말자라는 확신이 들어 그런 마음속 이야기들을 정성스레 담아 한줄한줄  대학원 입학 준비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작성하였다.


서류 준비는 유학원 등의 도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하기로 했다. 해외 생활도 꽤 해본 터라, 대학원 관련 서류를 스스로 준비하지 못할 정도라면 대학원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또, 내 힘으로 준비해 합격 여부에 따라 내가 진정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추천서 등 필요로 하는 모든 서류를 제출 후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다행히 인터뷰 관련 연락을 받게 된다. 회사 면접은 많이 봤지만 학위 인터뷰는 오랜만이라 많이 떨렸지만, 새로운 것을 이루려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 곤 혼자되네였다.


아직도 인터뷰를 보러 가는 날 버스를 기다릴 때가 떠오른다. 혹시라도 맞는 정거장에 도착해서도 혹시 잘못 타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확인을 몇 번을 다시 하고 그렇게 30분 일찍 도착한 면접장에서 리셉션에 계신 분이 나의 긴장한 모습을 풀어주시고  싶으셨는지. " 이렇게 캠퍼스가 많은 학교를 한 번에 잘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합격입니다"라고 농담을 던지셨다. 덕분에 나도 본격인터뷰 전에 긴장이 좀 풀어졌던 것 같다. 다행히 인터뷰를 하는 동안 교수님들의 표정도 매우 좋으셔서 혹시 합격이 아닐까 하는 좋은 느낌이 들었고, 다행히 며칠 후 합격 통지서를 드디어 받았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서류 준비를 열심히 한 보람과 그동안 미뤄오던 대학원 공부를 드디어 시작하게 된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그것도 40대 중반에 아이를 키우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사실 두려운 점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공부하면서 조금씩 되찾아지는 ‘나’를 느낄 수 있어서 참 좋기도 했다.


첫 리포트를 제출할 때는 아카데믹 라이팅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며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건가’ 하는 혼란과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겁도 났다. 하지만 리포트를 계속 작성하면서 다행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갔고, 제출할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는 보람도 느낄 수도 있었다.


결국 졸업장을 받을 때는 Distinction이라는 최고 등급을 따내는 성과를 이뤘다. 엄마로서 아이를 돌보고 실습까지 병행하며 공부까지 한다는 게 여러모로 결코 쉽지 않았기에 단지 합격만 해도 감사할 줄 알았는데, 최고 등급으로 졸업이라니 꿈만 같았다.


지금생각해 봐도 대학원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공부한 적도 많았고, 일주일 내내 책상에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배겨 꼬리뼈가 아프고 걷기 힘든 기억도 있다. 대학원 수업 후 아이를 학교에서 픽업하고 저녁을 챙기며 숙제를 도와주고 나면 이미 지쳐 있었고, 커피 한 잔을 벌컥 벌컷 들이키며 커피의 힘을 빌려 남은 공부를 하곤 했다. 마음은 저 멀리 있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속상하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뒤로하고 시간을 아껴가며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엄마로서의 아이의 일상이 내 공부로 인해 뒷전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의 식사를 모두 직접 만들어 주고 숙제도 같이 하며, 아이가 잠이 들 때까지 온전히 엄마로서 시간을 보낸 후, 아이가 잠든 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가끔은 피곤해서 책만 펴놓고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적도 정말 많았다. 가끔은 너무 피곤한데 모두 잠든 새벽 일찍 일어나 공부를 해야 할 땐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하는 공부만큼은 대충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을 무사히 잘 졸업하는 것은 학교가 판단할 일이지만, 내가 얼마나 노력할지는 내게 달린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문득 처음 아무 연고도 없던 런던에 혼자 와서 해외 취업을 하고, 내가 꿈꿔오던 삶을 위해 나름 치열하게 런던에서 생활하던 20대 시절의 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일궈나가는 시간들이 언제나 꽃길 같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분명 그 시간들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정조준해 돌진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뚝심도 얻게 해 주었다.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만큼 열심히 엄마로서 그리고 대학원생으로서 이 두 가지를 병행했기에, 졸업장에 찍힌 Distinction 마크를 볼 때마다 뿌듯함과 자부심이 차오른다. 무엇보다 이런 열정과 노력이 아이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보람을 느낀다. 가끔 공부하다 힘들어서 울적해하거나 지쳐 있을 때 “You can do it!”이라고 외치며 나의 최고의 응원자 둘이 되어준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힘이 들어 마음이 흔들흔들할 때 누군가의 응원은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주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가족들의 응원의 힘과 함께 나의 졸업장은 우리가 함께 이룬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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