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이라 부르지 말고 선배라고 불러."
호칭에 '님'자를 안 붙이는 기자들의 세계는 신선했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도 상사를 부를 때 선배, 부장, 국장이라 불렀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직이라는 것을 비춰봤을 때 신기한 문화다. 나 또한 '기자님', '선배님'이라 불렀다가 지적받기도 했다. 이는 오디오맨에게도 적용되는 칼 같은 규칙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을 취재할 때 주눅 들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전통이라는 것. 그러나 호칭에 '님'만 안 붙었을 뿐, 평기자들과 관리자급들은 철저한 수직관계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님' 자를 붙이는 게 허용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형님'이라 불리는 사람들로 보도차량을 운전하는 기사들이었다.
오디오맨부터 촬영기자, 취재기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형님이라 호칭했다.
형님들은 보도 차량을 운전하지만 신분은 오디오맨과 같았다. 오디오맨이 하청업체와 계약을 맺고 방송국으로 파견 온 것처럼 형님들은 렌터카 회사와 계약을 맺고 들어왔다.
이들의 업무는 기자를 취재현장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것. 운전이 어려울 게 있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오산이다. 교통이 혼잡한 수도권에서 발휘되는 형님의 실력이, 시간에 쫓기는 긴박한 순간을 모면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오디오맨이 출근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취재일정과 배차 표다.
나는 유독 배차 표에 민감했다.
취재일정이 힘든 것은 개의치 않지만 배정받은 형님이 별로면 그날 하루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즉 어떤 형님을 배정받냐에 따라 취재를 나가는 촬영기자와 오디오맨의 하루 컨디션이 좌우된다.
내가 좋은 형님과 나쁜 형님으로 분류할 때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전화를 잘 받는가.
형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건 오디오맨 담당이다. 당시 내 휴대폰에는 '형님 이름+차 넘버'로 저장된 번호가 수두룩했다. 형님들은 회사 근처에 대기하다가 오디오맨의 연락을 받고 움직인다. 둘의 커뮤니케이션은 취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급히 이동해야 할 때, 형님과 연락이 안돼 피 말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광화문 청사에서 MNG로 중요한 브리핑을 연결해야 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 빨리 자리를 잡고 준비해야 하는데, 형님과 연락이 안 됐다.
몇 번을 전화해도 연결이 안 되, 결국 데스크가 배정받은 차량을 빌려 출발했다.
그 형님은 오디오맨 사이에서도 전화 연결이 어려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차 안에서 무협소설 읽는 걸 즐겼던 형님의 휴대폰이 항상 진동으로 설정돼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둘째, 내비게이션을 잘 보는고 다니는 가.
가끔 배정받은 형님들 중 길을 못 찾고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공서 등을 제외하고는 취재 현장이 일반 주택가나 먼 지방일 수도 있기 때문에 길 찾기가 어려운 건 이해한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이라는 유용한 도구가 발명된 게 아닌가.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지시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지 말을 안 듣고 가다 길을 빙빙 도는 상황이 발생한다.
여유 있게 출발했음에도 급하게 현장으로 뛰어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선배는 카메라를 들고, 나는 트라이포드와 장비 가방을 들고 숨이 차게 뛰는 상황.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는 좋은 형님은 딱 한 분 있었다.
곱슬 장발머리에 갈색빛 도는 안경을 끼고 검은 계열의 옷을 주로 입으셨던 형님인데, 운전 센스는 기본이고 인성마저 뛰어난 분이셨다. 지금도 이름과 모습, 목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형님이었다.
그 형님이 배정된 날은 나와 촬영기자 선배가 마음 편히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하루였다.
얼마 전, 취재차 회사 근처에 왔다는 Y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주차장으로 배웅 갔다가 보도차량에 계신 형님을 만났다. 오디오맨 때, 일정을 몇 번 같이 나갔던 분이었다.
"형님, 예전에 오디오맨 하던 친군데 기억나세요?"
선배의 질문에 형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수년간 많은 오디오맨들이 스쳐 지나갔을 텐데 기억하는 게 무리였을 거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잠깐 뵙게 된 형님의 모습을 보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도 있었지만 반대로 일을 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형님들의 운전 덕분이었다.
나의 성장을 이끈 경험의 바탕에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형님들의 발과 운전대를 잡은 손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MNG(Mobile News Gathering)
-방송용 카메라 등으로 취재한 영상물을 엘티이(LTE)와 같은 무선 통신망으로 전송하는 방식.
-주로 중계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서 사용되며 재난 재해와 긴급 보도 등 사건 현장에서 간이 시스템만으로도 고화질 생방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