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어떤 그릇에 담기는가
1969년 런던,
비틀즈는 예고 없이 소속사 옥상에 올라가
'Get Back’을 불렀다.
경찰이 출동해 공연을 중단시키기 전까지
런던의 교통은 마비되었고,
이 ‘루프탑 콘서트’는 도시의 공공장소를
예술로 점유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2026년 서울, 광화문 광장을 점령한 BTS의 무대는
비틀즈의 옥상과 닮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현대의 무대는 광화문 광장만이 아니라,
전 세계 190개국을 잇는 디지털 망,
즉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한다.
“우리 가수의 공연을 왜 외산 플랫폼에 맡기느냐"는
애국심 섞인 탄식이다.
사실 경제학적으로 이 비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유치산업 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을
꺼내 들어야 한다.
과거 우리가 포니 정주영 회장의
자동차 산업을 지켜냈던 방식 말이다.
1970년대, 성능 좋은 외제차가 즐비했음에도
정부는 높은 관세 장벽을 세워 국산차를 보호했다.
걸음마 단계인 우리 자동차 산업이
거대 기업과 경쟁할 체력을 갖출 때까지
'우리 울타리’ 안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해 준 것이다.
국내 콘텐츠 플랫폼이
거대 공룡인 넷플릭스에 맞설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국가적 자산인 BTS를 활용해
'우리 울타리’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린 나무가 자랄 때까지 버팀목을 대주듯,
국내 OTT를 위해 전략적 독점을 허용하자는 논리다.
하지만 지금의 플랫폼 시장은
그때의 자동차 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게임이다.
자동차는 국경에서 관세로 막을 수 있었지만,
디지털 콘텐츠는 빛의 속도로 국경을 지운다.
여기서 우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드림팀’이 보여준
경제적 진리를 복기해야 한다.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이 이끄는 미국 농구팀은
모든 상대를 압도적으로 파괴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결과가 뻔한 독주였음에도
전 세계는 비난 대신 환호를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보여준 ‘대체 불가능한 압도적 가치’가
독점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콘텐츠는 가장 넓은 무대에서
가장 많은 이에게 닿을 때
그 가치가 온전히 증명된다는
냉혹하면서도 투명한 진리다.
결국 BTS와 넷플릭스의 결합은,
과거 자동차 산업처럼 보호막 안에서 길러내는
'내수용 성장’이 아니라,
드림팀처럼 압도적인 실력으로
전 세계 시장을 즉각 점령하는
'가치 극대화 전략’을 택한 결과다.
티빙이 국내 OTT 시장의 ‘포니’가 되길 기다리기엔,
BTS라는 콘텐츠의 유통기한과 파급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다.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를 떠올려보자.
당대 최고의 성악가
'3 테너(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가
오페라 하우스라는 견고한 성벽을 허물고
축구 경기장으로 나왔을 때,
클래식의 가치는 훼손되었는가?
오히려 그들은 위성 중계라는
당시의 ‘첨단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 8억 명의 안방으로 침투했다.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클래식이
거대한 ‘규모의 경제’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BTS가 넷플릭스를 선택한 것 역시
3 테너가 경기장 마이크를 잡은 것과 같은 이치다.
경제학적으로 문화 콘텐츠는
소비해도 사라지지 않는 ‘비경합적 재화’다.
따라서 한계 비용(MC)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은
아티스트의 가치를 무한대로 확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넷플릭스라는 거대 플랫폼은
단순히 ‘남의 나라 서비스’가 아니라,
우리 문화라는 소프트웨어를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송출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인 셈이다.
애국심이라는 감정으로
이 효율적인 유통망을 거부하는 것은,
옥상에서 노래하는 비틀즈에게
"우리 동네 사람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추라"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애국심은 우리 문화를 꽃피우는 비옥한 토양이지만,
그 꽃을 세계의 자산으로 만드는 것은 경제 논리다.
진정한 문화 강국의 자부심은
플랫폼의 국적을 따지는 편협함이 아니라,
우리 콘텐츠가 가장 큰 그릇에 담겨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장면에 있어야 한다.
비틀즈의 옥상이 런던의 한 귀퉁이였다면,
넷플릭스를 탄 BTS의 광화문은
이제 전 세계인의 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