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는 책을 사는 마음, 지적 자본의 ‘구별 짓기’

텍스트 힙과 한강 열풍

by Jay


두꺼운 고전 소설이나 난해한 철학 서적을 들고

세련된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이 SNS를 채운다.

이른바 ‘텍스트 힙(Text Hip)’이다.


독서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서점은 문을 닫는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책은 가장 ‘힙’한 패션 아이템이자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특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 현상에 거대한 엔진을 달아주었다.

서점 오픈런이 벌어지고

실시간 베스트셀러 목록이

한 작가의 작품으로 도배되는 광경은,

책이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하나의 경제적 '현상'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경제학은 이 현상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스놉 효과(Snob Effect)’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제안한 과시적 소비는

상품의 기능보다 '비싼 가격'이나 '지위'를

소비하는 행위다.


여기에 '난 너희와 달라'라고 외치는

스놉 효과가 더해진다.

대중적인 숏폼 영상에 매몰되지 않고

굳이 어렵고 느린 종이책을 선택하는 행위는,

자신이 보편적 대중과 다른

고상한 취향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고도의 시그널링(Signaling)이다.


과거에는 명품 가방이 부를 상징했다면,

이제는 어떤 책을 읽느냐가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다.

베블런의 '가격'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 스놉의 '문장'이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초기 텍스트 힙이

소수의 차별화 전략이었다면,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에는

“나만 이 역사적 조류에서 소외될 수 없다"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까지 가세하며

거대한 시장을 형성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이는 18세기 유럽의 살롱 문화와 닮아 있다.

당시 귀족들이 실제로 이해했는지와 상관없이

서재에 최신 철학서를 비치해

계급적 우월성을 확인했듯,

오늘날의 인스타그램은 거대한 살롱이 되고

책은 그 안에서 유통되는 가장 세련된 화폐가 된다.

한강 작가의 책을 찍어 올리는 행위는

그 살롱에 입장하기 위한 가장 뜨거운 '티켓'인 셈이다.


결국 텍스트 힙은 독서의 본질인 ‘내면의 성찰’보다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정의되는

나의 문화적 자본에 집중하는 경제적 행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허세와 과시에서 출발했을지라도

의미는 작지 않다.

‘읽지 않는 책’을 사는 행위가 모여

고사 직전의 출판 생태계를 지탱하고,

허세의 끝에서 단 한 명이라도

진짜 문장의 전율을 경험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적 베블런재는

충분한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돋보기] 취향을 전시하는 심리

• 과시적 소비(베블런 효과): 가격이 높을수록, 혹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좋을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텍스트 힙에서 책은 일종의 '지적 명품' 역할을 한다.

• 스놉 효과(Snob Effect): 대중적인 유행을 거부하고 희귀하거나 차별화된 취향을 추구하는 심리. '나는 숏폼보다 활자가 편하다'는 선언이 이에 해당한다.


•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 특정 상품이 유행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소비에 편승하는 현상.

한강 작가 수상 이후의 전국적인 도서 구매 열풍을 설명할 수 있다.


• 시그널링(Signaling): 자신의 보이지 않는 가치(지적 수준, 가치관 등)를 드러내기 위해 특정 비용(책 구매, 독서 시간)을 지불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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