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 는 의식을 가지고 생각과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다르다는 말
황현민
모래알보다도 많다는 수많은 별들처럼 바닷가의 모래알들도 서로 다르다. 각양 각질의 서로 다른 존재들이다.
다르다, 는 것을 늘 의식하고 말을 바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어, 처음 만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배우 정우성을 떠올렸다고 하자. 혹은 얼굴을 보고 배우 한효주를 떠올렸다고 하자. 이때, 목소리가 정우성과 비슷하네요, 한효주를 닮으셨네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의 오류 아닐까 싶다. 다르다, 는 의식이 있다면 이런 경우에는 비슷하다, 닮았다, 는 말을 해선 안될 듯싶다. 있는 그대로 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배우 정우성이 떠올랐어요, 님을 보니 배우 한효주가 생각났어요, 그냥 이렇게 말해야 바른 말이 아닐까?
비슷하다, 닮았다, 라는 말은 서로 다른 존재를 다르지 않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들이 많아지면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개성(순수와 고유)을 잃고 혹은 무시당하고 서로를 비교하는 혹은 다들 똑같다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나아가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가 개개인의 존재를 흩트리게 할 수 있으며, 집단적으로는 우선시 되어야 할 개인의 존재성이 약화되거나 무시될 수 있기에 다르다, 는 의식을 늘 가지고 말을 해야 할 듯싶다.
점점 유행을 따라 하고 대중화가 되어 버렸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어쩔 수 없는 현상 같지만 생각은 바로 하고 말이라도 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 닮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과 닮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존재감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칭찬을 위해 일부러 사용하는 것은 가끔 눈 감아 주자.)
그렇다면, 왜 하나를 보거나 들으면 왜 다른 것을 떠올리는 걸까? 그것은 인간의 '연상'하는 능력 때문이다. 어떠한 사고를 할 때, 이러한 연상이 없으면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인데, 이러한 연상은 생각할 때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 화가가 만취하여 그림 하나를 뚝딱 그렸을 뿐인데 명작이 되었다고 하자. 이때 술 취한 자가 단순히 붓을 휘둘기만 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분명 어떠한 연상이 작용하여 작품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작품을 바라보고 무언가가 연상되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런 생각없이 마구 썼다고 해도 무언가에 의해서 시 하나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난해한 시도 결국 읽는 이에게 무언가 연상이 되어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상 작용은 매 순간 일어난다. 정우성을 떠올리고 한효주를 떠올리는 것은 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단, 생각과 말을 할 때, 비슷하다 혹은 닮았다고 하면 안 될 듯싶다. 이런 경우에는 단지 떠올랐다고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제대로 말하고 싶다.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백석이 떠올랐다면 백석의 시를 닮았네, 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인 백석이 생각나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물론, 난 제대로 말했을 것이다.) 그 뿐이다. 아, 다르다, 는 것에 요즘 많은 생각을 했다.
최근 바둑을 두면서 응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바둑의 돌이 사람의 말처럼 그 수가 많고 다양하다. 상대의 돌에 반응하여 바로 받아주는 것은 하수의 돌이다. (앞으로 즉흥적인 말과 글을 삼가해야 겠다.) 늘 응수타진을 해야 하는데, 바로 받지 않고 다른 곳을 두어 더 큰 돌을 두거나 아예 받지 않고 전혀 다른 곳을 키울 수 있다. 응수를 잘하는 돌이 좋은 돌인 것처럼 사람의 말도 바로 받아 말하지 않고 유보를 하고 보다 큰 말로 하던지 아니면 받아 말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던지 하는 것이 좋은 말이란 생각을 한다. 즉흥적인 생각과 말은 하수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응수를 잘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며 흑과 백이 더불어 좋은 바둑을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상대의 돌을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받아 두는 것을 따라두기라고 한다. 따라두기는 선수가 아닌 후수다. 이것은 분명 따라하기다. 일명, 노예근성이라고들 한다. 돌과 말, 모두 내 돌과 내 말이다. 내 돌과 내 말의 주인은 나다. 당연히 응수타진하여 내 돌을 두고 내 말을 해야 한다. 매순간 수처작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글을 쓴다면 보다 다른 말과 보다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겻들여 본다.
비슷하다와 닮았다, 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 그냥 떠올랐다, 고 말하자. 거기까지다.
수처작주,
이 말 참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나로 존재한다면 이 또한 가장 훌륭한 수처작주란 것을 알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미 만들어진 길을 찾아가는 것은 따라가기일 뿐이지만 내가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다르다, 이고 수처작주, 이고 응수타진, 이란 것이다. (아무 길을 내지 않고도 늘 내가 나로 존재하기만 해도 그만이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나서도 다시 죽어서도 모든 존재는 늘 다른 존재이고 다르게 존재한다. 모든 존재들은 늘 달랐고 지금도 다르고 앞으로도 늘 다른 존재들이다.
아, 늘 이렇게 살고 싶다. 생각만 이러하지 말고 말이다.
늘 아트만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