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상 자신(감) 결여에서 일차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있냐 없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깨달음은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삶에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일제강점기부터) 이러한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찾지 못하도록 거꾸로 교육을 실시했다. 나 자신을 찾을 겨를이 없도록 성적순과 입시제도를 실시했다. 동아리나 예술과 체육활동을 할 틈조차 없애 버렸다. 독서를 하고 상상을 하고 여행을 다닐 틈조차 없다. 입시를 위해서 오로지 교과목 수업과 학원을 오고 가며 암기식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선 인성교육이 전혀 없다. 이게 학교라니 말이 되는가? 선생님들도 교육 개선의 의지가 없다. 이러한 교육시스템 자체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더욱더 굳어져 가고 있다. 그렇게 학생들은 어마무시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인생의 절반의 절반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입시생들이 한번 감기에 걸리면 잘 낳지 않은 원인이 되었던 게다. 바로 스트레스 때문이다. 나야, 뭐, 학창 시절 이런 학교가 싫어서 공부 따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출퇴근을 했고 야간자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놀았다. 아, 그래도 딱 1년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내 인생도 편했을 텐데...
사람은 나 자신을 각성할 때 자신감이 생겨난다. 이럴 때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움이 와서 행복하고 건강하고 나이 들어도 냄새나지 않고 젊게 잘살 수 있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으면 최고겠다. 근력 운동도 추가하자. 이 또한 모두 스트레스가 없어야 효과가 좋으리라.
스트레스란,
늘 신나고 즐겁게 살면 물리칠 수 있겠다. 즉, 자신있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각성하는 것이 첫째다. 나 자신의 판단과 나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 때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정말 행복하니까
왜, 옛날, 소수의 사람들이 출가를 하며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겠는가?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출가를 어찌 결심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진리와 지혜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이 세상은 객체일 뿐이다. 가족(가정)은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오늘날 출가는 거의 없다. 온 가족이 자신을 각성하고 함께 살아간다면 그것이 출가가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각성한 사람은 오류투성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가 어렵다. 각성한 자가 그 속에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어울릴 수밖에 없다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뭐, 그러려니 하고 생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일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류투성이 세상 속에서 어울려도 매 순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늘 신나고 즐겁게 늘 자신있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곳에 살아도 괜찮으리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타인들을 깨닫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룰 수도 있으리라. (뭐, 오너가 된다면 보다 쉽게 오류투성이 세상 속에서 살 수 있겠다 싶다.)
이렇듯, 나 자신을 아는 자는 스트레스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아는 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 즉, 늘 자신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 자격인 셈이다. 자신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야 바로 내 삶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아는 자는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진리를 알고 지혜를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각성했으니 좋은 신들이 좋은 사람들이 늘 곁에서 도울 것이니까 좋은 에너지들이 늘 곁에 늘 나 자신에게로 모여들 테니까
하지만, 오류투성이 세상에 어마무시한 오류덩어리가 지구를 덮쳤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좋은 에너지들이 상쇄하기 시작했고 나쁜 에너지들이 여기저기 냄새를 풍기며 불쾌하게 산재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앞서 말한 나 자신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마구 파괴한다. 앞서 말한 좋은 에너지들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고 아주 쉽게 사람의 심신을 파괴시킨다. 오히려 공포를 조장하여 어마무시한 스트레스를 생산해서 사람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나 자신으로 살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나 자신을 알 때 스트레스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나 자신을 각성할 때 진리를 알고 지혜로울 수 있다. 나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즐겁다. 무엇보다 나 자신으로 늘 신나고 즐겁게 늘 자신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스트레스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자. 스트레스도 일종의 균이라고 하자.
육체를 아프게 하기 위한 균들이 있듯이
정신과 마음까지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 균이다. 이 무형의 균은 인간의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이 균이 바로 종교에서 말하는 사탄 혹은 마귀다.
우울증 등 정신적 상처는 바로 스트레스에서 기인한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한 균인지 알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 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연구가 진행된 바 없다. 단지 치유를 의한 연구만 개발되었을 뿐이며 이에 오만가지 치료제와 약물이 출시되었다. 왜냐면 현대 문명은 스트레스 생산을 오히려 지향하고 그 해결을 위해 전혀 애쓰지 않았으니까
스트레스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어마무시한 것까지 그 종류와 형태가 다양하다. 무형의 이 균을 특정 짓는 전문 용어조차 전무하다.
스트레스를 사탄 혹은 마귀로 바꿔 읽으면 이해하기 딱 쉽겠다. 이렇게 스트레스 균에 당한 인간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사회를 망쳐버린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 무형의 균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세상과 우주까지 쉽게 망쳐버린다. 바이러스는 이러한 스트레스에 비하면 새발에 묻은 먼지만도 못할 것이다.
오늘 이렇게 스트레스에 대해서, 그동안 나의 적이었던 이 우주 공동의 적이며 균이었던 스트레스에 대해서 여기 메모를 남긴다. 결국 인류와 그 외의 모든 삼라만상이 이렇게 사소한 스트레스라는 균때문에 멸망하고 사라졌다라는 사실도 알아야 할 듯싶다. 자연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늘과 땅과 바다까지 무너지고 뒤틀리는 법이니까
인간이 아주 쉽게 번뇌에 휩쓸리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 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텐데... 현대 문명은 이러한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부추긴다. (때론 그것이 너무 남용되기도 했지만,) 이 땅의 그 옛날에는 이 스트레스 균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행복이란 바로 이 황당한 균에 침식되지 않고 혹은 벗어나 살아가는 삶이었다. 백성들의 스트레스가 심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은 가물었듯이 이미 이 균을 알고 대처했다. 그래서 정신세계를 보다 중요시했던 까닭이다. 물질보다 마음을 더 중요시했던 까닭이다. 당연한 이치다.
스트레스 균을 물리치기 위한, 이 스트레스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나 자신을 아는 자는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나 자신이 있는 자는 스트레스에 상처 받지 않으며 나 자신이 없는 자는 스트레스에 상처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가장 특징이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스트레스라는 것을 인간은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인간의 덕을 중요시했다. 덕이란 것도 바로 나 자신을 찾아서 진짜 나 자신이 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홍익인간과 인내천 사상에 다 담겨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고전을 연구해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불치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스트레스, 이것을 균으로 인식하고 옛 선조들처럼 미리 예방하기 위해 심신을 잘 가꾸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물질보다 마음과 영혼을 알아가는데 더 힘쓰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각성하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말이다.
여기 주문을 추가한다.
몸에 힘 빼고 호흡을 고르게 하면서 아래 주문을 세 번 읊조리자.
"나와 우리는 살아있는 부처요 신선이요 하느님이요 하나님이요 자신이다. 나와 우리는 진짜요 진리요 지혜다. 늘 신나고 즐겁게 늘 자신있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