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닫히면 창문이 열리듯
내 주위에 많은 여성이 결혼 전후로 일을 그만두었다. 출산과 육아 문제로 끝내 여성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국경을 넘는 장거리 연애 중이니, 출산과 육아 심지어 결혼도 하기 전에 이른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함께 있기 위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은 물론이고, 삶을 통째로 바꾸는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큰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직업을 발견했다. 여행 가이드라는 직업은 내 성격과도 잘 맞고, 나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영어를 쓰고 싶은 나에게, 이 일은 오히려 내가 돈을 받으면서 외국어를 연습할 수 있는 황금 같은 밥벌이가 분명했다. 체력적으로 힘든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싫은 건 죽어도 못하는 내 성격에 운명과도 같은 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독립 출판물을 꾸준히 만든 덕분에 가끔 글쓰기 강의와 북토크를 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하고 싶은 일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었고, 그렇게 보상받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언젠가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두려웠다. 물론 그는 나와 함께 있기 위해서 자신이 한국에 올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내 쪽에서 원치 않았다. 나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된 사람처럼 살았기에, 내가 내일 당장 떠난다고 해도 주위에서 그럴 줄 알았다며 금방 수긍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뉴욕에 가면 할 일이 많지만, 그가 부산에 와서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판단했다.
우연히 한 여성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안정된 직장과 보장된 승진을 남겨두고 무작정 남편과 함께 제주도로 떠난 여성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우선순위는 언제나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걸 뒤로하고 사랑이 가장 중요한 사람도 있구나. 멋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그녀가 정말로 멋있었다. 나의 새언니 역시 꿈을 가지고 대학에서 영양학을 전공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고, 주위에서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지금은 육아에 집중하고 있다. 노력한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고 물으니, 새언니의 어머니는 오늘날까지도 아까워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인생에 한 번쯤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과감히 포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엄마다운 옆모습은 고결했다. 아이를 갖는 것 또한 그녀의 꿈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릴 용기를 가진 위대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자꾸 용기가 생겼다.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꾼 것은 친구의 지나가는 듯한 한마디이기도 했다. 내가 떠나게 될 경우를 상상하며 미리 이것저것 찾아보던 때였다. 미국에서도 여행 가이드를 하기 위해서 시험을 쳐야 한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의아해했다. 굳이 뉴욕까지 가서 똑같은 직업을 가져야 하냐는 단순한 질문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하고, 뉴욕은 예술의 도시라고 하는데.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야가 좁아진 것이 분명했다. 무한한 가능성이 넘치는 도시로 떠나면서 나는 왜 이토록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굴었을까. 나는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길을 선택해서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녀의 한마디로 더 좋은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에 불이 켜졌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볼 때마다 자주 연결감을 느끼고는 한다.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각각의 점들이라면, 그 점과 점 사이가 선으로 연결되어 삶은 이어진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지금을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점 하나, 그리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미래에 있을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또 다른 점 하나. 이처럼 내게 일어난 모든 점이 차곡차곡 쌓이고 연결되면서 어느 행선지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들고는 한다. 문이 닫히면 창문이 열리듯, 하나를 버리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번에 걸어가게 될 길에는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나에게는 아직 미지의 세계. 내가 전혀 모르는 길.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그가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