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사람
나는 부산에 살고 있고, 그는 뉴욕에 살고 있다. 그는 엄마 친구의 아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가 새로 사귄 친구의 아들이다. 엄마에게는 처음 만난 사람이 자신과 동년배일 경우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엄마가 소개해 준 인연 중에 마음이 끌린 이는 없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는 예상이 들어 그의 사진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뒤, 만약 내가 뉴욕에 놀러 온다면 휴가를 내서 구경시켜주겠다는 말을 전달받고 조금 혹했던 것이다. 뉴욕 구경을 시켜준다는 말보다 나를 위해 휴가를 내겠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프로필 사진 속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엄마, 나 이 사람 마음에 들어!”를 외치게 되었다.
그렇게 그와 어느 초여름부터 연락하기 시작했다. 3일 만에 이루어진 첫 통화에서 우리는 거의 3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한결같음’에 대해서 말했고, 그건 내가 가진 잠재적 불안까지 잠재우는 주제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첫 대화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유쾌했다. 만일 그날 오후 내게 약속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수다는 서너 시간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잘 이어지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통화는 모든 걸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나는 실제로 만나지도 못한 그가 단번에 좋아져 버렸고, 그건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날은 에어컨 밑에 누워 온종일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를 반복하며 6시간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11,000km나 떨어진 사람과 무료로 통화할 수 있게 앱을 만들어 준 사람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해 여름, 그와의 대화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선풍기 바람처럼 그저 편안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연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업상 성수기 비수기가 나누어져 있는 나는 겨울부터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었고, 마침 추수감사절과 블랙프라이데이 등등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한 11월에 우리는 뉴욕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때가 거의 160일이 남았던 시점이었다. 계절은 바뀌어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부산에도 동백꽃 피는 시기가 찾아왔다. 서머타임이 끝나면서 그와 13시간에서 14시간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시차 때문에 더 이상 길게 통화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기약도 없이 이대로 연애했다면 (이 관계를 지속하기가) 힘들었을 거라고 내가 말하자, 금방 내 말뜻을 알아들은 그는 자신은 그럼에도 (우리의 관계를 위해) 이대로 노력했을 거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처럼 나와는 다른 점에 자주 감동하고는 했다. 그의 성격과 말은 불안이 인생의 큰 화두인 나를 늘 안심시켰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우리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고, 매번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언제나 나를 안심시키는 그의 고유한 말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그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오래 기다릴 수 있었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하얀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깨달은 것은 연애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이다. 우습지만 진실이다. 매번 찾아오는 사무친 외로움과 곁에 아무도 없을 거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제 할 일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런 불안감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내가 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단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자신의 미래 계획에 나를 끼워넣기에 자연스레 내 다음 단계를 상상하게 되었다. 나 혼자만을 위해 세워둔 계획은 그다지 다채롭지 않은데, 그를 만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이번 뉴욕 여행. 그렇다면 내 인생에 놓친 것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 준 사람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한다. 나를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새로운 맛을 알려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사람.
지금 이 글을 인천공항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내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우리 내일 만나’하고 인사했다. 그를 만나기까지 단 하나의 비행만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뉴욕에서 내게 어떤 일이 생길지, 한 달이 넘는 기간 그와 함께하면서 어떤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을지 무척 기대된다. 앞으로 쓰게 될 글은 나의 뉴욕 여행기이자 그와 함께 지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