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쉼표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달라진 마음가짐이 필요했어. 공간이나 환경을 바꿔도 내적 상태를 고수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공간은 새로워졌어도 마음은 갇혀 있는 기분이었어. 코로나로 인해 여행은 보류하고 집을 지켜야 했고. 게다가 한겨울에 보일러가 말썽이었어. 서비스센터 신청 과정에서 대리점 직원의 사사로운 대응이 문제를 키웠고, 제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 내 몫이었지. 보일러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몇 번의 통화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에서 보일러 작동 원리를 조금 알게 되었어. 겨울철 접수가 많아 3주가량 걸렸지만, 어쨌든 내가 처리했어.
기계는 내 몫이 아니었는데… 이제 나의 일상은 전부 내 몫이었고, 자유로운 대신 혼자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어. 그러다 보니 자잘한 톱질 정도는 내가 해. 처치 곤란이던 가구를 쓱쓱 내키는 대로 분리해서 치워버렸어. 그러자니 혼자라서 두려울 것도 없을 것 같더라.
문득 마지막 운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았어. 네가 그렇게도 불안해하던 내가 이제는 운전을 해. 면허를 따고 십 년이 되었어도 초보라고 말해왔지만. 어쩐지 지금까지의 내가 인생 초보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보일러 작동 원리를 이해하듯이, 번번이 처음 내딛는 새로운 선택을 했었고, 그때마다 낯선 환경을 만나 도전하면서 나도 많이 변했어. 누군가는 무모한 도전이라 했지만, 스스로는 모험이라고 부르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때로는 발견하려는 기대를 가지고 꾸준히 모험을 시도했어.
그런데 아직도 삶에서는 초보였어. 어쩌면 새로운 직장, 새로운 공부, 새로운 관계성을 통해 초보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버텨온 건 아니었을까.
보일러 수리가 끝난 뒤 '드디어 떠날 수 있다'는 들뜬 마음으로 당장 떠날 수 있는 가장 먼 곳 제주도 티켓을 예약하고 결심을 실행에 옮겼어.
여행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
김포공항 출국장 앞에서 면허증이 아니라 민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챙겨 왔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해서부터 트렁크를 끌고 다녀야만 했어. 사전 준비가 없었기에 날씨는 가는 날부터 비가 내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떠나왔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나로서 살아가기
예상하겠지만, 초보 여행자는 여행에 관한 준비가 너무도 없었기에 매우 고생스러웠어. 검색해서 찾은 유명한 식당에 다녀와 탈이 나서 며칠 동안 죽도 못 먹었고, 도로에서 보내야 했던 시간도 꽤나 길었어. 제주도 주민인 마냥 약국을 다니는 피곤함 속에 우습게도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갔어.
그러던 중에 예약한 숙소에 문제가 생겨 서귀포 어느 골목에 있는 슈퍼 앞에서 쉬고 있을 때 할머니 한분이 옆에 와 앉으셨어. 할머니가 한 손에 들린 호떡을 반쯤 먹고서 조심스레 물었어. 여행을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혼자 여행을 왔다는 나에게 "여행은 혼자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셨고, 잠시 침묵이 흘렀어. 몇 분이 지나서 숙소는 정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남은 호떡을 입에 넣으셨지.
혼자라도 괜찮다던 착각의 끝에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어.
인생은 톱질이 아니라는 걸… 비록 톱밥 같은 부스러기가 남을지라도. 삶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오래도록 내 마음은 너를 부르고 있었다는 걸.
물론 그간의 모든 모험은 값진 도전이었을 거야. 그러나 그 기쁨을 나누어 배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는 걸 알았어. 여행 초보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하늘이 가장 맑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아?
마치 쪽지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었어.
어젠가 우연히 마주치는 날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 삶은 너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은 너에게 말하던 내 꿈들을 모두 이루었다고.
삶은 계속된다 = 꿈은 이루어진다
늘 초보였던 나에게 어쩌면 초심자의 행운이었는지도.
이렇게 지난 시절에 안녕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