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강원도로 바람을 쐬러 갔다. 봄 날씨마냥 화창했던 날이라, 무얼 해도 기분이 좋았었다. 첫째 아이가 어릴 적에 타봤지만, 오랜만이라는 명분하에 정선 레일바이크를 타러 갔었다. 첫째가 2살이었던 10년 전 가을 어느 날이었는데, 그 당시는 뱃속에 둘째 꼬물이가 자리할 때였는데도 페달을 돌리며 힘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날은 유달리 숨이 차고 힘에 겨웠다. 역시 서른과 마흔은 다르구나. 제대로 온몸으로 실감했다. 그래도 10년 동안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커서 페달에 다리가 닿아 함께 굴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뒤에서 쫓아오기 무섭게 열심히 나아가야만 하는 힘겨운 싸움 같았던 4인승 레일바이크는 몇 번의 터널을 통과했다. 3월 중순의 강원도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어두컴컴한 터널 안은 더없이 스산했다. 터널을 통과하는데 남편이 큰 소리로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 중에서...) 장난기 가득한 그를 지켜보며, 옆에서 난 그저 웃는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데?"
"안 돌아갈 건데...? “
"그래도 진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을 거 아니야. 진지하게 생각해 봐."
"진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또다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겪고 싶지 않아.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처럼 모든 기억을 안고 돌아간다면 몰라도..."
나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언제로 되돌아갈까? 낙엽만 굴러가도 깔깔대며 웃기 바빴던 아무 걱정 없던 십 대로, 청춘이란 무기로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이십대로, 아니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정신없이 보내야 했던 삼십대로? 모르겠다. 진짜 언제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현재의 기억은 모두 빼앗긴 채로, 다시 인생을 산다면 난 과연 지금보다 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있는 내게 옆에 있던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돌아가도 아마,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 않을걸~~." 아니야. 나 완전 다른 사람으로 살 거야라고 호언장담하지 못했다. 사실, 크게 달라지고 싶은 욕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다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내더라도, 지금과 별반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 않아서이다.
내가 살면서 끝까지 봤던 드라마는 한 손에 꼽힐 정도인데 그중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고백부부"다. 남편과 둘이 엉엉 울며 처음 한번을 본 후, 좀 더 집중해서 보고 싶어 혼자 두세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한 한 부부가 함께 살며 사랑하지 않게 되는 현실적인 내용에, 둘의 가장 힘겨웠던 순간에 20살 푸릇푸릇한 대학생으로 돌아가버리는 비현실적인 내용이 가미된다. 둘은 다시 맞이한 20대를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끽하며 살아내지만 자신들이 낳은 아이를 볼 수 없어 마음 아파한다.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내며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수 있어 행복해하는 여자주인공은, 보고 싶은 아이를 볼 수 없어 되려 슬피 운다. 드라마에서는 부모 없이는 살아도, 자식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온다. 부모님이 안 계신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항상 옆에 자리해 주셨고 그게 당연한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 아빠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시니 아빠,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갑자기 두려움으로 다가와 마음이 힘든 며칠이었다. 그것도 잠시 또 나와 내 아이들의 일상을 살아내고는 있지만, 한동안은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빠,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그래도 난 고아는 아니네?라는 생각에 안도감도 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게 이런 거구나. 집에서 멍하니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고, 누구에게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깊고 깊은 터널에 들어가 한동안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고 슬픔이었다.
자식을 잃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봤다.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큰 슬픔일 듯하여, 선뜻 위로조차 나오지 않았다. 연세가 들어 결국 언젠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일이지만, 내 소중한 아이들이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일이라는 게 내 진심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란 말이, 내 새끼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 나였다.
내가 다시 인생을 되돌린다면 아마도 내가 가장 치열하게 살아낸 30대로 돌아갈 것 같다. "네가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를 가고도 남았을 거야"라는 말을 엄마와 여동생에게 아이를 키우며 처음으로 들었다. 너무 이뻤던 내 아이들의 사랑스러웠던 그 시간들이 가끔은 살짝 그립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인의 의지대로 살아야 했던 그때의 나날들은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지만, 무사태평한 내 인생에서는 정말 격정적으로 살아내야만 했던 영원히 잊지 못할 찰나의 기억들로 가득하다. 내 아이가 나를 보며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던 가슴 벅찬 순간, 느린 편이었지만 처음으로 한발 한발 내디뎠던 아슬아슬했던 기억, 처음으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며 엄마인 나를 위로해 줬던 날들, 모든 것이 지나고 났더니 소중한 추억이란 말로 내 가슴속에 선명한 자욱을 남겨주었다.
다시태어나도 꼭 나와 결혼하겠다는 남편에겐 다시 태어나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절대 우리는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내 진심은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남편을 만나 또다시 지금의 내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로 난 더없이 성숙함을 느끼고, 살면서 가장 큰 행복도 누려보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에, 누군가를 제대로 된 참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나아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참 의미 있는 것임을 알기에, 나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상 속 소소한 추억들이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