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보단 건강, 건강보단 시간

by 김상혁

05. 2024년 2월 14일

유기농 쌈채소 농장에서 돈 안받고 쌈뜯은지 3주 째. 나는 매일 매일 맨발로 흙을 밟으며 쌈을 뜯는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몸으로 일을 하지만, 서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몸과 마음이 편하다.





아침 8시 반이 되면 이 곳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드립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터키를 다녀온 사무장님이 가져온 홍차를 마시기도 한다. 아직 온 지 3주 쯤 지난 나는 가만히 대화를 지켜본다.가 아니라 이제 3주 쯤 되니까 막 끼어들기도 한다. 우와 커피가 맛있네요. 제가 그 J쌤 쌈채소 뜯는 자세 해보니까 되게 어렵던데 왜 그 자세로 하는거에요? 등등등 3주면 적응을 하는 것 같다. 21일이면 사람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게 되는 것 같다. 곰이 100일 마늘을 먹겠다 약속하고 난 뒤 신이 인간으로 만들어준 시간이 21일 이었던 것처럼.


쌈채소를 뜯는다. 나만의 최적화된 자세가 있다. 레이지 안경이라고, 정면을 바라보면 수직의 아래가 보이는 안경이다. 이 안경을 알게 된 계기가 참 독특한데, 우리동네키움센터 라는 아동센터에서 공익근무를 할 때였다. 아이들에게 나는 늘 책을 읽는 캐릭터였다. 사무실에서 여느 때처럼 책을 읽던 언젠가, 또래보다 키가 훨씬 큰 6학년 짜리 남자애 한 명이 내 옆에 오더니 ‘선생님 이것좀 보세요. 이거 읽고 책 읽으면 아래가 보여요 흐흐흐’ 라고 말하며 다가왔다. 그 안경을 써보니 안에 거울 같은 것으로 정면을 봐도 아래가 보이게 하는 안경이었다. 무슨 이런 게 있지 하고 그냥 지나쳤지만, 역시 처음 보는 물건이라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나보다. 1년이 넘게 지난 지금 쌈채소를 고개를 숙여 뜯으면 허리가 아플 것 같아 떠오른 물건이 바로 그 안경이었다.



2024.02.15 나의 게으른 안경 쌈뜯는 자세

“바보 같다.” 여기 쌈채소 농장에 계시는 J쌤이 그 안경을 쓴 나를 보고 한 말이다. 얼마 전에는 조금 나를 너무 공격했다 느끼셨는지 바보 같다고 말하지 않고, "바보같은 겉모양을 한다" 라고 표현했다. 장족의 발전. 사람을 꼴 그대로 바라보면 계속 기분 나쁜 게 아니라 그 안에서의 변화도 보이는 것 같다. 난 그 안경을 끼기 시작하면서 5시간 6시간을 일해도 스트레칭 한 번 할 필요 없는 쌈채소 최적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가 오면서 다짐한 것이 하나 있는데. 왼손을 쓰자. 우뇌를 쓰자. 생각 그만하자. 좌뇌를 그만 쓰자. 그래서 아주 은밀하게, 쌈채소를 뜯으면서 훈련하는 것이 바로 왼손으로 쌈채소 뜯는 일이다. 나는 프리미어리그 레전드 손흥민처럼 양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그래서 양쪽으로 허리를 자유자재로 회전하며 자세를 다양하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체면보다 건강, 건강보단 시간. 실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당연히 불편했다. 새롭게 온 남자 숙소 방도 온풍기를 틀어도 되는 줄을 몰라 약 2주동안은 거의 냉방에서 자다시피했고. 도시에서 생활하며 익숙했던 생활에 대한 여타저타의 기준들이 과감하게 깨지는 이 곳에서 캐캐묵은 체면 생각이 가라앉질 않아 오히려 여유도 없이 하루 종일을 당장 내일 죽을 듯이 자기계발에 몰두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곳에서 누구보다 더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아마 그 또한 ‘나는 충분히 마음을 먹고 이 곳에 왔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일지 모르겠다. 쌈채소 하우스에 맨발로 휘젓고 다니며 ‘도시 사람들은 흙을 찾아서 맨발로 걸어요’를 시전하는가 하면. 그렇게 더러워진 맨 발을 ‘나 여기있소’ 하고 자랑하듯이, 물로 씻고난 후 화장실 문 앞에 덩그러니 앉아 휴지로 닦았다.

IMG_4963.JPG 24/02/12 맨발로 버려진 쌈을 밟고 있다

그래 체면보단 건강이다. 도시에서 체면 세우며 사느니, 여기서 맨날 맨발로 흙 밟고, 바보같단 소리 듣기 싫어 목을 망가트리느니, 초등학생의 호기심이 담긴 안경을 끼고 편하게 쌈채소를 따는 게 낫다. 나는 그 체면을 다 내다버리러 이 곳에 온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사실 체면을 버리는 게 제일 어렵다. 어찌보면 체면을 버리는 것 또한 새로운 체면일지도 모른다. 이 체면을 한꺼번에 다 버리고 나면, '나는 그 체면을 버렸다'는 새로운 체면을 쌓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게 인생의 묘한 점이다. 그렇게 체면을 새롭게 갈아 끼고 갈아끼다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는 체면을 선택하고 끝까지 가다보면 체면이라는 것 자체가 참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체면이라는 단어를 생각한 나의 기준 자체가 참으로 무의미한 사람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 내가 지금 이 순간 감각하는 것과는 아예 다른 바깥세상의 무언가를 위한 체면으로 가득 차있지 않았나.


그렇기에 체면보단 건강인 것이다. 애초에 체면이란 것이 세워봤자 남는 것도 없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헛깨비이기 때문에.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꼭 건강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엄마도, 여기 동네 나이 든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육체적 삶이 버거워져 건강을 위한 해답을 이리저리 찾아다니지만, 내겐 그 해답이 묘한 합리화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근육을 1kg 늘리는 것이 1억을 모으는 것과 같다’ 같은 말이 그렇다. 결국 건강을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1억을 여러번 벌지 못한 걸 보상하기 위한 건강챙김이 작동하는 것 같다. 오래 살다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가오기 마련이니,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것은 이제 돈이 아니라 건강일테지.


건강보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죽음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삶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면 건강은 중요하지 않을 것 이다. 내 행복을 내가 스스로 걷어차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내게 다가오는 행복한 순간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해가 오후 4시 40분이 지나 슬며시 내 옷깃으로 다가오면 앞으로 노을이 지기 전까지의 시간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 할 게 없을 때 잠시 아주머니들이 깔깔 대는 사무실을 찾아가 커피 한 잔 하며 여유 있게 대화들을 엿 듣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고 좇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행복을 바로 내 앞에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은 건강보다 중요하고. 시간은 체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나의 이 곳에서의 삶을 세워주었다. 허나 그 또한 단순한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지 않을까? 굳이 그런 비교를 하지 않아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 있을텐데. 껍질을 벗겨내는 데 많은 힘이 쓰였다. 껍질을 크게 들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성을 들여 껍데기가 붙은 마감부분을 깔끔하게 떼어내자. 그럼 나는 나비가 되어있을 수도 있겠다고. 더 활활 날고 싶은 나는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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