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여행
초콜릿 한 알 같다. 내가 처음 글방에 들어왔을 때, 어떤 분께서 초콜릿 한 알을 먹으며 글을 쓰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의 인상이 참 기억에 남는다.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사람과 초콜릿 한 알을 먹는 모습이 무척 어울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 나는 내가 흰 색 배경에 한자 한자 글을 적는 것이, 흐릿한 내 안에서 선명한 조각들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것이 마치 초콜릿 한 알을 꺼내어 먹는 것 같다고 적었다.
인생은 마치 초콜릿 한 알 같다. 난 지금 노르웨이에 사는 유투브를 통해 알게된 사람의 가족과 함께 일주일 정도 이 곳에 머물고 있다. 그 사람은 조현병, 우울증, 강박장애, 기타 모든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는 정신질환들이 사실 축복이며, 이 질환들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 속 밝은 빛을 회복하기만 하면 치유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나는 한국에서 상담도 받고 책도 읽으며 마음치유를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한국 사람의 눈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눈치껏 행동해라. 그 사람은 말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절대 알 수 없다며, 마음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표현해야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노르웨이 사람들과 지내며, 자기의 아내, 아이들과 지내며 계속 확인하는 것이라며. '아마도 그러는 과정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계속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또 보이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을 추측하려 했다. 그것이 내가 늘상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기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을 미리 추측하려 애쓰는 것. 눈치껏 행동하기 위해 철저히 미리 준비하는 것. 그것은 정확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나의 눈치, 말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잠깐 떠난 트롬쇠 여행까지 따라왔다. 말하지 않는 것도 사람은 은연중에 느껴. 그 느낌이 있기 때문에 눈치라는 말도 있는 거고. 그 느낌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의사를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능사일 때도 있는거야. 그건 우리들의 나름의 지혜라고. 어쩌면 모든 것을 표현하는 그들보다, 마치 내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안다고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고 느낄 수도 있어.
그래서 삶은 더 힘들어지지. 삶은 고달퍼져.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내가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은 분명 화를 낼거야. 내가 이걸 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분명 실망할거야. 나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는 지금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실망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 위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다는 자각을 하고,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마냥 내 마음대로 나를 다 표현하고 나를 다 드러내면, 그건 보이지 않는 관계의 실을 무시하는 것 아닐까?
말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위의 흔들림 속에서 우린 깊은 심연을 발견하기도 해. 난 그것을 초콜릿이라고 부르는거지. 인생의 초콜릿. 떠오르는 온갖 감정과 상처와 실망의 가능성을 혼자 깊이 고민했을 때라야만이 느낄 수 있는게 있는 것 같아. 그게 지금 내가 듣는 음악에도 담겨있어. 그 음악과 그 음악의 가사들은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드러내서 공기중으로 휘저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거든. 내가 호흡하는 공기조차 내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모든 것을 다 삼킨 후에 내뱉는 그 초콜릿 같은 음악들은 사람들을 깊이 위로해. 그게 비록 혼자만의 추측과 망상일지라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일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가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가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본 이 사람의 가정은 나의 아빠처럼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화를 내지도 않고, 내가 먹고싶지 않은 걸 먹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나의 엄마처럼 내가 고통스럽게 내 삶을 고민하는 것을 안쓰럽고 불쌍하게 바라봐서 빨리 안정적이기만을 원하진 않으니까.
심성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다 드러내고, 다른 누군가가 자기의 존재를 어떻게 느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그렇게 있는 것일까. 어느 스님처럼, 모든 것을 다 마음 안에 모아놓고서, 다 내보내고, 간직하고, 다른 모든 존재들을 향한 자비와 연민을 항상 그렇게 보내는 것일까. 세상에 부딛히고 부딛혀 지쳐버린 어린아이에겐 스님의 지혜가, 속세를 무겁게 짊어진 스님의 어깨엔 어린아이의 붙잡는 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난 사실 이 사람에게 많이 감사하다. 그의 유투브를 통해 내가 삶에 배운 것은 돈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맙다는 말도 잊어먹을 정도로 당연한 존중과 환영을 해주는 이 집에서 모두가 다 각자의 일상을 위해 나간 사이 혼자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도. 특별하게는, 트롬쇠에 가는 날 차로 기차역까지 데려다 준 후 내가 가방을 놓고 온 것을 발견했을 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다음 기차 시간이 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오늘 근무에 수업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기도 그런 적이 있다며 홍콩 가는 비행기를 늦잠때문엔 놓칠 뻔 했다가 오히려 비즈니스 석에 앉은 이야기를 해준 그 존중의 순간에도. 아마 이 모든 것을 나도 다른 사람에게 당연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신경쓰느라 끝까지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존중을 이 사람은 계속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위와 같다고 한다. 계속 더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넣고넣고넣고 아빠에게, 엄마에게, 다른 사람에게 계속 안좋은 것을 주입받고 주입받고 하면 토할 수밖에 없는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아 벌써 해외 생활도 40일이 넘었다. 가끔 아빠와 술과 밥을 먹는 자리가 그립다. 족발, 회, 갑오징어 회무침 온갖 것들을 ‘먹어’ ‘우리 가족은 엄청 잘먹잖아’ 라는 아빠의 말과 함께 먹고 싶었다. 좋으면서도 사실 싫었다. 아빠랑 만나는 날은 항상 배가 엄청 부르다. 먹고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배 왼쪽에 위가 있으니까, 내가 그래서 왼쪽 어깻죽지가 늘 아픈건가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