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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r 28. 2022

햇볕에 따뜻해진 호수를 닮은 책

훌훌(문경민 글;문학동네;2022)

제12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 수상작 '훌훌'의 표지는 파란색과 초록색 만으로 도시와 강과 다리, 숲을 표현한다. 수채화 같은 풍경 위로 빛이 반짝이고 그 빛의 시작 지점에 '훌훌'이라는 제목이 위치해 있다. 온통 푸른빛 사이로 갈색 점퍼를 입은 아이가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계단을 온전히 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한 칸을 남겨두고 소녀는 무슨 일인지 아래에 펼쳐진 세상으로 몸을 돌려 쳐다보고 있다.


'훌훌'은 18살 서유리의 이야기다. 서유리는 얼른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지역의 대학을 가는 것이 꿈이다. '훌훌'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서유리는 할아버지와 산다. 할아버지는 서유리의 할아버지가 아니다. 서유리는 입양되었다. 서정희라는 엄마에게. 그러나 서정희 엄마는 서유리를 할아버지에게 맡겨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서연우를 낳는다.


서연우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엄마와 연우가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사는지 모른 채, 할아버지와 유리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희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유리와 할아버지 사이에 연우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훌훌'은 여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가던 유리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비밀 아닌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돌아보고, 멈춘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했다. 어떤 상처도, 어떤 부대낌도, 어떤 위태로운 기대나 상처가 되고 말 애정도 할아버지와 내게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집을 훌훌 떠나면 됐다. p. 172


유리는 언제나 혼자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살아있지만 집에 없고, 아빠는 누군지 모른 채 택시기사를 하는 할아버지와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변의 동정을 살만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 할아버지의 친손녀가 아닌 것까지 밝혀질까 봐 어떤 누구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을 꽁꽁 싸매고 훌훌 털어버릴 생각만 하고 있던 유리. 그런 유리가 서정희 엄마의 아들 연우에게 차차로 마음을 열면서 세상의 풍경이 조금씩 변한다. 유리는 연우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연우도 결국은 나처럼 될 것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힘들겠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을. p. 52


문학동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역시 문학동네군 하는 지점이 있다. 한 편의 수채화 같은 서정적인 느낌.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깊이가 보이지 않는 기분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훌훌은 그런 문학동네만의 대표적인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고등학생 특유의 고민과 우정, 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갈등이 거대한 사건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훌훌을 읽고 있으면 일상적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비밀들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 누구나 삶은 그런 거 아닌가. 이혼조정을 하는 부모가 있을 수도 있고, 사실은 입양 가족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와 둘이 살 수도 있고,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수도 있고, 집에 아픈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아플 수도 있다. 그런 모두가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시간을 살지만 다른 장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겪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늘 저녁 무얼 먹을지 고민한다. 앞으로 삶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나눈다.


"그 정도면 죽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독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더라. 일단 우리는 전쟁을 겪고 있지 않잖아. 지독한 곳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로 죽어 버리겠다고 말하기는 나는 좀 그래.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거야." p. 207


유리는 끝까지 자신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수도 있었지만,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앞으로 유리의 삶은 '아프지 않고 돈에 쪼들리지 않고 적당한 간을 깨끗하게 관리하며 살고 싶었p.115'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의 마음만은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마음의 문을  유리에게 마주 마음의 문을 열어 주는 할아버지, 연우, 친구들, 담임선생님이 있으니까.


연우는 내 눈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문장)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가 입양 가정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란다고, 그리하여 슬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비켜서지 않았을 거라 말한다. 작가의 말과 책의 표지는 다른 듯 같은 말을 한다. 그 두 가지가 '훌훌'전체에 흐르고 있다. 읽는 내내 유리를 둘러싼 사람들 덕분에 따뜻했다. 유리에게 건네지는 그들의 행동과 말에서 내가 위로를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나도 슬픔에 비켜서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훌훌은 그런 책이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루 종일 햇볕을 쬐어 따뜻해진 호수의 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선물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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