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안 Apr 13. 2022

우리가 우리를 구하는 희망

라스트 베어(헤나 골드 글;레비 핀폴드 그림;창비;2022)

-“프리루프트슬리브(Friluftsliv)”

“영어는 매우 유용한 언어지만 때론 어떤 경험이나 성격을 한 단어로 묘사하기 부족하단다. 방금 그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노르웨이 단어야. 직역하자면 ‘야외생활’이지.”p. 35


'프리루프트슬리브'마치 마법사의 주문 같다. 이 말이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을 말하지만 정확한 영어 표현은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2022년 BBC블루 피터상을 수상한 '라스트 베어'에서 주인공 에이프릴 우드에게 아빠가 건네는 말이다. 라스트 베어는 엄마를 잃고 아버지와 사는 에이프릴 우드라는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베어 아일랜드에 살게 된 몇 달간의 모험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생 에이프릴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엄마의 품보다는 아빠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아빠는 아직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빠는 베어 아일랜드의  기상관측자를 신청한다. 그리고 아빠와 에이프릴은 베어 아일랜드로 간다. 희망을 품고서. 아빠도 에이프릴도 엄마의 부재를 계속적으로 안고는 삶을 지속해나갈 수는 없다. 아빠는 어떤 변화를 꿈꾸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에이프릴의 꿈은 확실했다. 아빠와 둘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


아빠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나, 베어 아일랜드에서의 아빠는 에이프릴에게 실망만 안겨준다. 영국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고 예민해진 아빠 때문에 에이프릴은 심심하고, 그립고, 슬프다. 마침내 에이프릴은 혼자서 베어 아일랜드의 탐험을 떠난다. 한때는 북극곰이 많아서 베어 아일랜드라고 이름 붙여진 이 섬은 만년설이 녹으면서 북극으로 가는 길이 끊겨 지금은 북극곰이 없는 베어 아일랜드가 되었다. 그럼에도 에이프릴 섬에 내리면서부터 북극곰의 존재가 이 땅에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북극곰을 찾아낸다.


라스트 베어는 베어 아일랜드에 남겨진 마지막 북극곰과 자연을 사랑하는 소녀 에이프릴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책은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묘하게 오가며 설득력을 부여한다. 곰은 사납고 위험하므로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야 하는 존재이다. 특히나 굶주리고 다친 야생곰과 친구가 된다는 건 판타지다. 그런데 작가는 책 속에서 그런 정보를 전달하면서 그럼에도 에이프릴은 곰과 친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함께하는 과정이 꾀나 매력적이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그려져 있다. 이미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 어른인 나 까지도 동요된다.


그렇게 동요하게 만드는 요인 중에 하나는 그림이다. 해나 골드 작가의 글도 좋지만, 레비 핀폴드 그림작가의 삽화 또한 이 책의 큰 매력을 선사한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흑백의 삽화는 입체적이면서 따뜻하다. 147쪽에 곰과 에이프릴이 나란히 누워서 지구의 탄식을 듣는 장면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지구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다. 멀리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하늘과 눈 그 사이에 일 듯한 바람, 그리고 곰과 에이프릴이 서로를 바라보며 귀를 바닥에 대고 있는 장면은 보고 또 보아도 아름답다. 같이 귀를 기울여 섬의 탄식이 바람에 실려오는 걸 듣게 된다.


한숨을 쉰 것이다.

에이프릴은 귀를 쫑긋 세웠다.

섬도 한숨을 쉴 수 있나? 에이프릴은 청각을 더 곤두세웠다. 또 나왔다. 한숨.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다. 생일 만찬이나 화이트 초콜릿 한 판을 다 먹고 나오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다. 뭐랄까, 어른들이 뉴스를 보거나 통장 잔고를 확인하거나 전화로 나쁜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탄식이었다. p 147.


어린이 책의 이런 글과 그림이 좋다. 어른들의 소설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단어를 설명하는 다정하고 담백한 문장이 어린이 책에는 자주 등장한다. 한숨과 탄식, 같은 것들 이미 어른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어지만 이렇게 아이의 눈높이에 설명하는 문장을 읽고 있으면 명확해진다. 어린이 책 중에서 이런 설명이 잘 나와있는 책을 만나면 반갑다. 여기에 그림까지 더해지니 '탄식'이라는 단어가 명료해진다. 섬이 아니 지구가 탄식을 내뱉고 있다. 우리는 듣고 움직여야 한다. 에이프릴이, 에이프릴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라고 북극을 안 살리고 싶은 줄 알아? 하지만 어린애 하나가 북극곰 한 마리를 구하는 걸로는 턱도 없어.”

“알아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지구를 위해 한 가지씩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부족해.”

“두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요.”p. 228


알고 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나 하나라는 이유로 한 걸음 물러서 있던 에이프릴이 움직인다. 에이프릴의 모습을 보고 아빠가 움직이고 친구가 움직인다. 마침에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인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매우 유용하다. 의사를 전달하고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책 '라스트 베어'는 말한다. "그래 말이라는 건 매우 유용하지, 그렇지만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것도 많단다. 말 조차도 지역별로 표현하는 확장의 범위가 다르다는 걸 아니. 우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서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를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해.'


“내가 왜 모차르트를 좋아하는지 아니?”

아빠는 걸걸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작곡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마음의 소리에 따라 살 때 거짓말하는 건 불가능하지.” p.224


책 속 에이프릴의 마음은 세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작가 해나 골드도 우리가 더럽힌 지구로 사라져 가는 것들과 사라질 우리를 지키기 위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음을 '라스트 베어'라는 소설로 만들었다. 그 마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길 바란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읽었다. '우리가 지구를 지키자'는 너무 오만한 말이라고. 작은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하고 신비롭고 위대한 행성에 스쳐 지나가는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구를 지킬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지키지 않으면 언젠가 베어 아일랜드의 마지막 곰처럼 지구에 사는 마지막 인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지구의 환경이 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라스트 베어'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따뜻하고 용감한 무려 244페이지지만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은 어린이 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햇볕에 따뜻해진 호수를 닮은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