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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r 30. 2021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그림책을 보더니 아이가 한마디 한다. “엄마, 이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그림책이야?”


그림책을 고를 때 좀 독특하긴 했다. 보통의 그림책은 크기는 다양해도 표지는 대부분 하드커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표지가 속지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뮤지컬을 관람한 후, 또는 미술관에 다녀온 후 구입하는 도록 같은 느낌의 그림책이라 조금 색달랐다. 표지의 볼이 빨간 소년이 마치 바람을 표현하는 것 같은 푸른빛(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흰색이 함께하는 파란색)에 감싸여 앉아 있다. 그리고 제목 아래에 구멍이 뽕뽕 뚫려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아름다운 그림에 현혹되고, 내가 사랑하는 바람에 눈이 팔려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소년은 걸어가며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바람의 색을 물어본다. 그에 대한 대답은 모두 다르다.


소년은 개울을 건넜어

“바람은 무슨 색이니?”

“물속에 빠진 하늘색이지.”


그리고 꼭 물속에 빠진 하늘 같은 그림이 등장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울도, 하늘도 아니다. 하늘과 개울과 물고기와 물풀 그리고 자갈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묘한 느낌의 그림이다. 물고기가 아주 생생해서 물비린내가 날 것 같은 그림이다. 초록색의 사과나무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나무이다. 사과는 마치 손도장으로 꾹 찍어 만든 것 같은데 초록나무와 사과의 향기가 나는 느낌을 준다. 종이를 손으로 쓸면 울퉁불퉁함이 손 끝에 전해진다. 손끝의 느낌은 각 장마다 조금씩 다르다. 아기 그림책 중에 촉감책이 있다. 아기들이  안전하게 다양한 촉감을 느껴 세상을 향한 감각을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다. 그런 책은 종에 사이에 실제로 촉감을 느낄 수 있게 천, 비닐, 플라스틱 같은 것을 끼워 넣어 천이나 비닐의 느낌을 전해 주거나, 천 사이에 비닐을 넣어 실제 아기가 만지면서 촉감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로지 종이의 압착으로 촉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냄새를 시각, 청각, 촉각으로 표현하는 듯한다. 그렇다 이건 눈이 보이는 내가 느끼는 감각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이 책이 어떤 느낌으로 읽힐지는 알 수 없다. 비장애인인 나도 바람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바람의 모습은 날아다니는 사람의 머리카락, 비닐봉지, 내 몸을 관통하는 힘 같은 것으로 느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바람을 가장 잘 보고 있는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일지도 모른다.


책의 뒷 페이지에는 파란색 손자국 4개와 아주 큰 신발 두 개가 걸어가고 있다.


“바람은 무슨 색이죠?”

아주 큰 거인이 소년을 향해 몸을 숙였어.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하지. 바람은 모든 색이란다. 네가 이 책 속에서 만난 모든 색처럼.”

소년은 손가락 끝으로 책을 꼭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뗐어.

한 장 한 장 책장이 스르륵 넘어갔어.


책의 뒷페이지의 손가락은 소년의 손가락이다. 소년의 손가락에 맞추어 책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떼면 책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그 순간 나와 내 주변에 누워있는 두 아이에게 책 속에 있는 모든 색들이 불어온다. 아이들이 바람을 맞고 즐거워한다. 그제야 표지를 본 아이가 점자를 발견한다. 엄마가 무심코 지나쳤던 그 구멍이다. 그림책에 대해 찾아보니 이 점자는 프랑스어로 ‘바람’이라고 한다. 평상시 엄마가 책을 읽고 감상을 물어보아도 얼렁 뚱땅이던 딸들이 묻기도 전에 나에게 질문한다.


둘째 “엄마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여?”

첫째 “안보이지.”

둘째 “그럼 어떻게 아는 거야?”

첫째 “예전에 봤던 걸 기억해서 보는 거야.” 아주 당당하게...

엄마 “시각장애인 중에서는 처음부터 하나도 못 본 사람도 있어. 그 사람들이 아마 이 책에 나오는 소년처럼 느끼지 않을까? 흙의 냄새와 감촉을 갈색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첫째 “하나도 안 보이는 거야? 정말 답답하겠다.”

엄마 “어떤 사람들은 얕은 빛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던데 색은 알지 못하겠지? 엄마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러곤 다 같이 잠이 들었다. 그림책은 그림의 모양과 색감을 눈으로 보는 책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아주 신기하게도 누구나 보이지 않는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색감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세상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색감과 그림까지 아주 아름다운 책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초록, 갈색, 파랑이라니.... 그리고 눈을 감은 소년은 우아하면서도 아련하여 나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책을 후루룩 넘길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과

색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심장으로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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