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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안 May 23. 2021

잘 키운 작약 20송이

집 앞에 길쭉한 택배 상자가 놓여있다. 일주일 전에 남편에게 옆구리 찔러 선물 받은 작약 10송이가 들어 있다. 화훼농가 살리기의 하나로 저렴한 가격에 영농조합에서 직거래 택배 장터를 열었다고 남편이 정보를 주길래 이 기회에 꽃 좀 선물해 보라고 말했다. 꽃 받은 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좋은 취지이니 한번 선물해 보라고. 그랬더니 이틀 뒤 네이버 쇼핑을 통해 ♥♥♥님이 선물한 꽃이 있으니 주소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특한 마음으로 주소를 입력했더니 잊어버리고 있을 때쯤 이렇게 도착했다.


5송이씩 고무줄을 묶어 비닐포장 2세트 열 송이가 아주 싱싱하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송이가 단단하게 여물어 있어 활짝 핀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한다. 집에 꽃병이 있나 살펴보니 역시나 없다.  애들이 배고프다 해서 일단 밥을 먹이니 필라테스 갈 시간. 남편이 퇴근해서 들어오는데 내가 받는 것과 똑같은 상자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상자를 보고 놀란다.


혼자 고민했었단다. 회사로 주문해서 나에게 실물을 선물할 것인가. 네이버 쇼핑으로 보내서 내가 주소를 입력하게 할 것인가. 그러다가 두 번째로 결정을 내렸다는데, 첫 번째 고민 한걸 취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택배 좀 많이 주문하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 생각했던 금액의 두배를 쓰고 남편은 충격을 받은 눈치다. 생물이라 반품도 안되고...

 
그런 상황을 보다가 급하게 필라테스 시간이 되어 출발하고 집에는 남편과 아이들만 남았다. 꽃은 여전히 상자째 두고. 필라테스 가는 길에 한 아저씨가 조그맣지만 예쁜 꽃다발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 본다. 순간 웃음이 난다.  받은 꽃이 저 정도 가격은 될 것 같은데  참으로 양은 많고, 야생적이다. 필라테스 갔다 오면 그거 다듬는 것부터 일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실수로 두배를 주문한 상황이, 화려한 꽃다발보다 촌스럽고, 다정스럽다.


운동 갔다 왔더니 큰돈 들여 구입한 작약이 걱정이었는지, 날 위한 배려였는지 남편이 잎을 다 따고 1.8리터 플라스틱 우유통에 빽빽이 작약을 꽃아 두었다. 그 많던 잎은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멋없고, 재미있다. 너무 빽빽해서 잘 뽑아지지 않는 작약을 한 송이씩 겨우겨우 뽑아서 가위로 짧게 잘라 스파게티 유리병에 어설프게 꽃아 두었다.


밤부터 엄청난 기세로 봉우리가 하나씩 열리고 있다. 조그마한 봉우리에 겹겹이 꽃잎이 숨어 있었다. 색도 모양도 다른 한송이 송이가 예쁜 작약을 보며 행복하다. 다 피어 예쁘게 꽃다발에 들어간 작약은 이미 완성된 작품이라면, 집에 도착해 시시각각 달라지며 하나씩 얼굴을 보여주는 작약은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다. 봉우리부터 조금씩 달라지 피어 가는 모습이 소담하니 우아하여 계속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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