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는 펭귄이 바다를 찾고 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준 건 사람이다. 그러니 이름이 없어도 괜찮다. 그래도 펭귄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가 그인 이유는 그와 함께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펭귄이 태어났을 때 함께한 것은 여럿이 아니라 단 한 마리의 코뿔소였다. 펭귄이 알에서 깨어난 순간 둘이 함께 있었던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지구 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흰 바위 코뿔소와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버려진 알에서 깨어난 펭귄이 함께 하는 그 순간 말이다.
흰 바위 코뿔소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 그의 이름은 노든이다. 그가 세상을 처음 알게 되면서 보였던 모든 동물은 코끼리이다. 코끼리 고아원에 들어온 흰 바위 코뿔소는 코끼리처럼 지낸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밖으로 나가게 된 흰 바위 코뿔소는 가족을 만든다. 그리고 가족을 잃는다. 그리고 다시 동물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친구를 잃는다. 이제 흰 바위 코뿔소는 지구 상에 노든 한 마리이다. 그에게는 동일한 몸짓과 감정을 나눌 것이 하나도 없다. 그에게 이제 남은 건 복수 그리고 죽음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불운한 펭귄, 버려진 펭귄에게 찾아온 마음의 상처를 입은 흰 바위 코뿔소. 그들의 여행은 끝이 없고, 긴긴밤은 계속된다. 긴긴밤은 그런 시간이다. 외롭고, 공포스럽고, 그리운 시간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해서 잠 못 드는 밤.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에 잠 못 드는 밤. 오늘 밤이 무서워 1분, 1분이 느리게 가는 밤. 무서운 내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잠 못 드는 밤. 그런 밤들에 흰 바위 코뿔소 '노든'은 이야기를 들었다. 코끼리, 부인, 친구, 버려진 알이 태어나도록 최선을 다한 펭귄이 노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같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노든 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다 대단한 일이지 그때는 몰랐었다. p. 94
이제 노든의 세상에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들이 없다. 대신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펭귄이 있다. 아기 펭귄이 잠 못 드는 긴긴밤에 노든은 들려준다. 들었던 이야기와 겪었던 이야기들을. 그렇게 그들은 기적적으로 만나 서로에게 '우리'가 된다. '긴긴밤'은 밤이 지날 때 옆에 '우리'가 있다면 아침을 맞이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아침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해서 다음에 올 '긴긴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때때로 '우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쌓인 '우리의 말'은 계속해서 남아 나아가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보듬을 힘을 준다. 긴긴밤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프고 따뜻한 책이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 바위 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124
루리 작가님의 작가 소개에 미술이론을 공부했다고 나와있다. 작가님의 전작 '그들은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그림책이다. 나이 들고, 쓸모없어져서 브레멘에 가려고 했던 동물들이 브레멘에 가지 못하고 어쩌다가 함께 모여 각자가 들고 있는 것들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두 번째 책인 '긴긴밤'은 작가님이 직접 그린 그림과 긴 이야기가 있는 144쪽에 달하는 이야기 책이다. 그림책도 좋았는데 글책도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니 놀라서 여러 번 작가의 이력을 확인했다.
작가님의 두 작품은 모두 동물이 주인공이며, 사람은 방관자이거나 해를 끼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나약하지만 따뜻한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소외되다가 '우리'를 만들어 낸다. 소외되고, 다시 연대하는 모습은 보는 내내 심장을 쥐어짜듯 아프게 한다. 그렇지만 꼭 기억해야 할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소외시킨 것도 나이고,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브레멘에 가지 못해도, 바다를 함께 보지 못해도 '우리가 함께라면' 이라는 따뜻한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작가님의 다음 작품은 어떤 형태로 무슨 이야기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