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꿈도 희망도 없다
대학생들이 독서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들을 때 독서감상문으로 가장 많이 제출한 책이 '이기적 유전자'라고 한다. 교수들이 전 세계 대학생 필독서로 이 책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1976년에 출판된 뒤 거의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책의 주장은 사실상 정설로 받아 들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세계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한 권을 추천할 수 있다면 이 책을 고르고 싶다.
그것과는 별개로 자연 선택의 최소 단위는 저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유전자보다 더 작은 단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가 ‘장수, 다산, 정확성’을 가지는 최소 단위 자기 복제자라고 주장하지만 유전자도 더 작은 개체의 집합이자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사람의 몸에는 수없이 많은 세포와 미생물, 바이러스가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들을 인체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들이 바로 인체를 이루는 구성 성분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들도 인간처럼 자유도를 최대한 증가시키는 방향으로(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나가려고 한다. 이때 이들의 자유도가 숙주인 나의 자유도와 대립하기도 한다. 나라는 몸은 최소 단위의 임의 조합이며 그 둔중한 집합체로서의 ‘나’는 ‘나의 몸’일 뿐 진정한 내가 아니다. 도킨스는 유전자보다 작은 단위는 장수, 다산성, 정확성을 띄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유전자 역시 더 작은 단위들이 유전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끔 하는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원시 수프 속에서 자기 복제자가 생겨났고 이 자기 복제자가 유전자다. 이 이론은 우주를 기반으로 하는 빅뱅 이론과 똑같은 전개 양상을 보인다. 빅뱅 이론에서도 한 점에 지나지 않았던 우주가 최초의 대폭발 이후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별이나, 지구상의 흙이나, 식물, 짐승들 내지는 바다와 같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전기이기도 하고 그보다 더 작은 소립자나 파동 같은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나쁜 습관을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한다. 마약중독자가 금단현상에 시달리다 못해 다시 약에 손을 대게 되듯이, 술도, 담배도, 폭식도, 도박도 마찬가지다. 내일 시험인데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마음도 그렇다. 개체는(여기서는 인간) 이런 행위가 나의 이익에 위배되는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몸을 구성하는 존재들(예를 들어 유전자들)은 몸이라는 거시적인 존재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근시안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유전자가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에 인간은 번번이 질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최대한 착취하려 든다. 인간이라는 둔중한 존재가 잘 못 느낄지라도 유전자 단위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부모는 자식에게 투자하면서 농부가 농사를 짓듯이 최대치의 이익을 뽑아내려 하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에너지를 착취하면서 성장한다. 세대 간에도, 형제 간에도, 성별 간에도, 같은 종끼리도 서식지와 번식 대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며 경쟁이 끊이지 않는다.
수컷을 수컷, 암컷을 암컷이라고 명명하는 기본적인 특징은 수컷의 생식 세포는 암컷에 비해 매우 작고 그 수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동식물 어느 것을 취급할 때도 마찬가지다. 큰 생식 세포를 가지고 있는 개체의 무리를 편의상 암컷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른 무리는 편의상 수컷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들은 생식 세포가 작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에 대한 기여도는 같다. 그러나 양분의 양에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정자는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평한 분량, 즉 50퍼센트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으므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잠재적으로 여러 마리의 암컷을 이용하여 단기간 내에 많은 수의 새끼를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개개의 배가 어미로부터 충분한 양분을 받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자식의 수에는 한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자식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의 암컷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모든 생식 세포가 쉽게 융합할 수 있고 또한 크기가 거의 같았던 시대에도 그중에는 우연히 다른 세포보다 조금 큰 생식 세포가 있었을 것이다. 큰 동형 배우자는 평균 크기의 배우자에 비해 어떤 면에서는 유리했을 텐데, 이들은 자신의 배에게 다량의 양분을 줌으로써 자신의 배가 남보다 출발에서부터 유리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자가 점점 커지는 경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동형 배우자가 꼭 필요한 크기 이상으로 커지는 것은 이를 이기적으로 이용하려는 개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셈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균보다 크기가 작은 배우자를 만드는 개체는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작은 배우자를 확실히 큰 배우자와 융합시킬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작은 배우자의 운동성을 길러 적극적으로 큰 배우자를 찾아낼 수 있게 하면 이들의 융합을 확실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고 활발히 움직이는 배우자를 만드는 개체는 더 많은 배우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자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대형의 배우자를 상대로 활발하게 찾아다니는 소형의 배우자가 자연선택에서 유리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 전략이 두 갈래로 진화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우선 대투자 전략 또는 정직한 전략이 있었다. 이 전략은 소투자 착취 전략의 진화에 문을 열었을 것이다. 일단 성 전략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을 것이다. 중간 크기의 배우자를 만드는 전략은 큰 배우자 또는 작은 배우자의 유리함을 갖지 못하므로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착취하는 배우자는 점점 더 작고 민첩해졌을 것이다. 정직한 전략의 배우자는 착취하는 배우자의 투자량이 점점 축소되어 가는 것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고, 착취하는 배우자가 늘 적극적으로 이들을 찾아 나서므로 운동성도 잃게 되었을 것이다. 개개의 정직한 배우자는 다른 정직한 배우자와의 융합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는 배우자를 배척하는 선택압이 착취하는 배우자가 그 장애물 아래로 비집고 들어오도록 하는 선택압보다 더 약했을 것이다. 즉 착취하는 배우자가 잃을 것이 훨씬 크므로, 착취하는 배우자는 이 진화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정직한 배우자는 난자가 되고 착취하는 배우자는 정자가 되었다.
성별 간 투쟁에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정직한 존재가 이기적인 존재를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 일단 수학적으로는 영원히 그럴 가능성이 없다. 대형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여 결과값을 구했더니 이기적인 선택을 한 존재가 이타적이거나 공정한 선택을 한 존재보다 월등하게 높은 점수를 취득하게 되었다. 이 실험을 이해하려면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죄수의 딜레마에는 독방에 갇힌 죄수가 두 명 등장한다. 이 두 사람에게 공범임을 자백하도록 심문을 한다. 상대의 대응 방식에 따라 나에게 주어지는 형량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게 된다.
A. 상대는 침묵했지만 자기만 상대를 배신했을 경우: 최고의 보상
B. 둘 다 배신했을 경우: 양쪽 다 불이익
C. 둘 다 침묵했을 경우: 보상은 주어지지만 혼자서만 배신했을 때보다는 적은 몫
D. 혼자 침묵했을 경우: 최악의 손해
실험 결과를 점수로 환산하면 상대가 협력을 하든 배신을 하든 개체 입장에서는 배신하는 것이 유리하다. 상대도 머리가 있는 이상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두 죄수는 영원히 서로 배신하는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평형 상태를 '내쉬 균형'이라고 부른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약자들끼리 협력하여 그들을 가두어둔 존재(유전자)로부터 석방이라는 보상을 얻어내야 하지만 개체는 자기 이익이 최우선이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균형을 통해 죄수들을 가두어놓은 자들은 언제나 기득권을 유지하게 된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한 반응 사이의 시간적 차이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었는데 상대는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보답하지 않고 '먹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초판에서 상대가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상대가 배신하면 나도 배신한다는 '팃포탯' 전략이 가장 안정한 전략이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오류로 밝혀졌다. 처음 전략을 시뮬레이션했을 때 이상주의적인 전략끼리만 대전시켰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전략들을 포함한 뒤 다시 시뮬레이션해보았더니 진정한 ESS(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주류 전략)는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전략이었다. 즉 이타적이거나 공정하게 경쟁하는 존재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문제는 시간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공정한 전략이 ESS 자리를 선점한다면 그 뒤에도 팃포탯처럼 공정한 전략이 쭉 ESS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사기를 치거나 배신하면 연쇄적으로 그런 개체들이 증가하게 되는데 일단 한 번 이 상태가 ESS로 자리 잡으면 공정한 개체나 이타적인 개체는 아무리 시합을 반복해도 이들보다 높은 점수를 올릴 수가 없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내쉬 균형이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한쪽이 다른 한 쪽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상황에서(운동장이 기울어진 것처럼) 경기를 치르게 된다는 의미인데 어떤 서식지를 먼저 선점한 종이 뒤늦게 서식지를 차지하려는 종과 경쟁할 경우 수학적으로 터줏대감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번 약자는 영원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 계급은 이미 고착되었으며 누구도 손해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약자는 항상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하려면 반드시 둘이 협력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을수록 협력의 가능성에 (부질없는) 손을 내밀어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묘사한 이야기가 한강의 1998년 작 소설 '검은 사슴'이다. 검은 사슴은 땅 속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사슴은 가끔 땅 속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지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감옥과도 같은 지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광부는 사슴의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주면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사슴은 아픔을 참고 뿔을 자르도록 허락한다. 그런데 광부는 뿔만 가지고 달아나버린다. 그 다음에 마주친 광부는 이빨을 자르게 해주면 길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빨을 뽑아 간 광부는 다시 약속을 어기고 제 갈 길을 간다. 이런 식으로 사슴은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고 서서히 몸을 잃고 해체되어 간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흐느껴 운다. 열에 하나쯤 혼자 떠돌다가 운 좋게 암반 사이 틈을 비집고 나와 꿈에 그리던 하늘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평생 어둠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햇빛을 보는 순간 실명해버리고 만다.
이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 대한 리얼한 메타포라고 볼 수 있다. 발 한 번 잘못 삐끗해서 저 사슴처럼 비참한 처지로 굴러떨어질까 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인사이더가 되기 위해, 중심에 머물기 위해 아래 쪽에 있는 사람들을 비정하게 짓밟는다.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손해를 무릅쓰고 대승적인 관점에서 우리를 옥죄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속박을 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