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ly Jun 04. 2023

콘센트 - 다구치 란디


영화 '콘센트' 중에서



어떤 남자가 집 안에서 누운 채로 굶어 죽었다. 죽은 남자의 여동생은 오빠가 왜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죽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오빠의 영혼은 가끔 그녀 주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빠가 죽은 방에서 맡았던 시체 썩는 냄새가 전철이나 공원, 거리에서 불시에 진동했다. 동료이자 애인인 기무라에게서도 그 냄새가 났다. 그런데 기무라는 직장암에 걸려 있었다. 그녀에게는 죽음의 냄새를 맡는 능력이 생겼다.      


죽은 남자의 여동생인 유키는 도쿄에서 주식 관련 에세이를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빠가 죽은 방을 방문했더니 전기를 꽂아놓은 청소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이 오빠가 보내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죽기 전에 콘센트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 잔혹 이야기’라는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였다. 조현병에 걸린 백인 소년이 초점 없는 눈으로 콘센트를 들고 있었다. 간호사가 콘센트를 꽂으면 소년은 갑자기 반응하고 의식이 돌아왔다. 이 소년은 콘센트를 꽂았을 때만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유키는 오빠 역시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콘센트를 빼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한다.     


‘사람은 죽는 순간부터 말 없는 존재가 된다. 말이 없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 오빠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자신과 나의 과거, 나의 인생을 깨닫게 된다. 떨어져 나간 기억의 단편을 기억해내야만 한다.’     


유키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대학교 때의 지도교수인 구니사다를 찾아간다. 그녀는 대학교때 심리학을 전공했었는데 당시에는 카운셀러가 되려면 누구나 직접 환자가 되어 분석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었다. 유키도 지도교수인 구니사다에게 분석을 받았었다. 구니사다는 그 당시 유키의 애인이기도 했다. 심리분석 과정에서 환자가 카운셀러에게 사랑을 느끼는 건 흔히 있는 경우였다. 유키는 구니사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 오빠와 관련된 기억을 털어놓았다.     


오빠는 유키보다 열 살이 많았다. 유키는 어렸을 때 오빠를 몹시 미워했다. 오빠는 유키를 자주 때렸고 어머니에게까지 폭력을 휘둘렀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선원이었는데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고 자식들에게도 폭언을 퍼붓곤 했다. 오빠는 아버지와 가정을 저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오빠는 부모가 지성인이 아니라며 경멸했다. 어머니는 오빠가 일자리를 얻어 집을 떠나고 난 뒤 자주 울었다. 유키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빠가 어머니를 때리기도 하고 심한 말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실화인데 작가에게는 실제로 방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죽어버린 오빠가 있었다. 아마도 작가의 어머니는 오빠를 상당히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 폭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감수성 예민한 아들이 측은했는지도 모른다.     


유키가 고등학생이 되자 오빠는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이직을 반복하면서 오빠의 정신상태는 서서히 황폐해져 갔다. 고향의 자기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고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일하지 않는 남자는 쓰레기라며 오빠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설득력 없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갔다. 오빠는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결국 아버지는 자제력을 잃고 유리 파편으로 오빠를 찌르고 말았다. 그대로 두면 둘 중 한 사람은 죽을 것 같아서 유키는 오빠를 도쿄에 있는 자기 아파트로 데려왔다. 오빠를 설득해서 카운셀링을 받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빠를 아파트로 데리고 온지 3개월이 지나자 유키는 정서불안에 빠졌다. 의욕 없이 멍하니 있는 오빠를 보고 있자니 아버지처럼 윽박지르고 싶어졌고 그대로 있다가는 자기도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청결을 유지하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빠는 세수는커녕 양치질도 하지 않는 것 같았고 탄산음료를 많이 마셔서 앞니 두 개는 녹아버린 상태였다. 간이 나쁜지 얼굴은 흙빛이었고 작은 습진이 나있었다.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면서 건강에 신경 쓰지 않은 탓인지 오빠의 체력은 말할 수 없이 약해진 상태였다. 유키는 가까스로 오빠를 설득해서 목욕을 하게 했지만 오빠가 얼마나 많은 심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보통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의 모임에 데려가려 하면 오빠는 완강히 거부했다. 끔찍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고 쉽게 상처 입었으며 사람을 만나면 녹초가 되곤 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유키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귀던 남자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로지 일에 관련된 준비를 할 때만 집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에 돌아와 보니 오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유키는 오빠를 찾지 않았다. 유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오빠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100만엔을 받아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끊는 위자료였어’라고 말했다. 오빠는 그 돈으로 방을 빌리고 다시는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2개월이 지난 뒤 오빠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오빠가 죽고 난 뒤에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구니사다의 교수실에서 나와 교정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유키를 불러세웠다. 대학 때 같은 연구실이었던 리츠코였다. 그녀는 다른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샤먼이 공동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리츠코는 샤먼이 ‘공동체 속의 콘센트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대학 시절 유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리츠코는 2박 3일 동안 심리요법 연수회를 갔을 때 사이코드라마 연습을 했던 때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그때 참가자 한 명이 정신을 잃고 착란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프로그램의 게스트 중 한 명이 참가자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는 착란상태에 바진 그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어. 넌 마치 그녀의 호흡과 깜빡거림에 자신의 주파수를 맞추려는 것 같았어. 네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의 그녀의 얼굴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그녀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널 보고 있었거든.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야. 넌 아이를 안 듯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어. 그리고 가슴을 머리에 딱 붙이고 이렇게 등을 쓸어주었어. 지면을 향해서 분노를 씻어내듯이 말야. 마치 그녀 내부의 분노를 해방시키는 것 같았어. 난 그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어.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더라구. 만약 카운셀러란 직업에 천분이 있다면 이 사람은 그걸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평소에 아사쿠라는 마음을 닫아둔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왠지 어마어마하게 감응하는 힘이 아사쿠라의 속으로 내려오는 것 같았어. 그건 나뿐 아니라 모두가 느끼고 있었을 거야. 어쩌면 구니사다 교수님도. 구니사다 교수님이 네게 끌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어. 그는 네 속에 자신이 갖지 못한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이 갖고 싶었던 거야’     


유키는 집에 돌아와서 또다시 오빠의 환영을 본다. 설마 하고 옆을 돌아보니 바로 옆에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무릎을 감싸 안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오빠의 옆모습은 슬퍼 보였고 시계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은 오빠가 죽은 방에서 가져온 낡은 시계로 원래는 유키의 것이었다. 유키는 시계 초침 소리에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뇌가 시계 소리에 숨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키는 자신이 그 암호를 영상으로 변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구니사다와의 다음 번 카운셀링을 마치고 유키는 화장실에 들렀다. 거기서도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칸마다 들어가서 확인해 봤더니 냄새는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칸에서 나고 있었다. 청소도구함에는 대걸레가 들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걸레 끝 언저리에 빨간 물이 들어 있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유키가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데 리츠코가 그녀를 붙잡고 괜찮냐고 물었다. 유키는 리츠코에게 오빠의 죽음에 대해 털어놓았다.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 오빠의 혼을 본다는 것, 오빠의 방에서 발견한 콘센트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오빠 방에서 가져온 콘센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건 콘센트가 아니야. 플러그야. 콘센트는 벽에 붙어있는 구멍이 난 것을 말하고.’     


구니사다는 유키가 사실 오빠가 죽기를 바랐고 오빠는 그 요구를 따르기 위해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유키가 화를 내자 구니사다는 10년 전 교육분석 때 유키가 처음 했던 말이 뭐였는지 기억하냐고 묻는다. ‘자넨 이렇게 말했어. 인간의 감정이 싫다고.’     


유키는 매일 술에 취해 싸우는 부모와 오빠를 보며 그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긋지긋해 했었다. 그래서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며 도망쳤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숫자를 다루는 증권 일에 매혹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감응이 잘 되는 체질이어서 녹초가 되곤 했기 때문에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굶주린 것처럼 아무하고나 자는 등 문란하게 살아왔지만 누구와도 진지한 관계가 만들지 않았고 그들 모두를 버렸다. 유키는 구니사다도 그런 식으로 한 순간에 버렸다. ‘나는 인간에 대해 콘센트를 빼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의 감정이 무서웠기 때문에.’      


구니사다는 유키와 같은 연구실에 있던 야마기시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야마기시는 의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트랜스 상태에 빠진 환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환자들이 ‘콘센트를 뺀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유키는 리츠코를 만나 야마기시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리츠코는 10년 전에 야마기시가 유키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신이 연구하는 샤먼은 곧 콘센트이며 샤먼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플러그를 그 콘센트에 꽂는 거라는 것도 알려준다. 그렇게 해서 초자연적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콘센트라는 말은 원래 함께 조화를 이루어 공감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야.’      

‘타이완에 지진이 일어나면 일본의 컴퓨터업계가 타격을 받았다. 그런 주식시장을 보고 있으면 세계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내란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걸 보더라도 이미 지구는 하나였다. 뭔가의 영향을 받아 주식의 등락이 결정되는 것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하나하나의 개체는 각자지만 그것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 역시 콘센트인 것이다.     


유키는 오빠가 자신의 플러그를 꽂을 콘센트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츠코는 여자 화장실의 대걸레에 대해서도 새로운 소식을 들려준다. 어떤 학생이 다량으로 하혈을 한 것을 대걸레로 닦아냈다는 것이다. 여자가 하혈을 한 이유는 아이를 유산했기 때문이었다.     


유키는 대학병원 대합실에서 야마기시를 만났다. 야마기시는 환자들이 트랜스 상태에 빠질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콘센트를 뺀다고 표현한다고 말한다. 공상에 빠지면서 현실의 긴장에서 도망쳐 망아 상태가 되는 것을 트랜스 상태라고 하는데 환자 중에는 자신의 의식이 몸에서 빠져나가 눈앞 20센티 정도에 떠있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야마기시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부의 자극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콘센트를 빼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한다.      


유키는 야마기시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말할 때 야마기시는 마치 자신의 하드디스크를 검색하듯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원을 켠 기계 같았다. 그는 도장을 찍듯이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고 살결이 곱고 피부에 탄력이 있어서 안겨서도 아주 청결한 느낌이었으며 땀도 흘리지 않았고 체취도 없었고 몸은 내내 차가웠다.’ 그 냉정함에 유키는 마음이 놓였다. 야마기시는 유키를 안을 때 그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으며 자신이 매우 깨끗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마음속에 어떤 기억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 야마기시는 설명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환자와 감응을 나눌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지. 환자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채로 실려왔어. 뜻도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경련을 일으키고 착란 증세가 보이고 한마디로 망가지기 전 상태였어. 하지만 아무리 황당무계하고 망상 같아 보여도 모두 의미가 있었어. 샤먼이라는 사람을 만났어. 치료행위를 하는 이도 꽤 있더군. 그들은 순간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환자를 고쳤어. 이쪽에서 10년 동안 하는 일을 고작 10분만에 해내. 어떻게 나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환자는 안정을 찾았어. 그것에 비하면 의사는 형편이 없지.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일정치 않고 상대를 골라. 파장이 맞지 않는 상대는 치료할 수 없는 모양이야.’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콘센트가 꽂혀서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거야. 동시에 다른 운영체제가 가동하기 시작했어. 지금까지는 네 의식이 그런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었던 거야. 아사쿠라도 오랜 동안 콘센트를 빼고 살아온 거 아냐? 아니, 그보다는 전압을 낮추고 살았다고 해야겠지. 그것이 가능했던 건 네 정신력이 강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흐르는 에너지를 몸에 가두고 살았으니 보통 사람의 열 배는 가는 것이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너는 사람을 싫어했던 거고. 인간들과 접하면 전압이 올라가니 말야. 내가 생각하기엔 네 오빠도 너와 같은 타입이었을 거야. 다만 네 쪽이 훨씬 강했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를 낮춰 살았으니까. 하지만 이제까지 봉인됐던 것이 풀리고 네 속에 잠재되어 있던 본래의 운영체제가 가동하기 시작했어.’     


직장암에 걸렸다 종양을 제거해낸 기무라에게 유키는 이별을 고한다. ‘난 내가 어떻게 그 냄새를 느끼게 됐는지 알 것 같아. 네가 오빠를 닮았기 때문이야. 마음이 따뜻하고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을 그대로 따르려고 애쓰는 점들이 오빠랑 무척 닮았어. 얼마를 빌리더라도 나는 이자 같은 것은 갚지 못해.’ 기무라는 오빠처럼 착한 사람인데 착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헌신하는 만큼 타인에게도 헌신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유키는 그런 깊은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오빠에게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을 다치게 할까봐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리츠코는 유키에게 콘센트는 너 자신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과 협조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너야.’     


유키는 꿈을 꾼다. 유키와 오빠, 어머니가 어두운 건널목에 서있었다. 유키는 다섯 살이었고 오빠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머니는 유키와 오빠를 두 팔로 단단히 잡고 있었다. 열차의 진동이 공기를 통해 느껴졌다. 어머니는 열차에 뛰어들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유키는 어머니의 팔을 물었다. 어머니는 무심결에 유키를 밀어냈다. 어머니는 오빠의 손을 잡고 선로 쪽으로 끌고 갔다. 오빠는 말없이 어머니에게 끌려 갔다. 가면 안 돼! 하고 유키는 소리쳤다. 오빠는 그녀 쪽을 돌아보고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유키는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려 장딴지를 물었다. 오빠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자주 죽고 싶다고 말했었고 노이로제 상태에서 자살하려 했었다. 꿈에서 깬 순간 유키는 어린 시절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가 폭력을 휘두르게 된 뒤로 그런 모습만 뇌리에 박혀 잊고 있었지만 오빠는 마음이 지나치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오빠는 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빠져들었다. 어디부터가 자기 자신이고 어디부터가 타인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했다.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세상의 인간들 틈에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무라를 만나 이별을 고하고 돌아오던 길에 유키는 갑작스럽게 트랜스 상태에 빠졌다.      


‘무수한 얼굴, 얼굴, 얼굴, 그리고 의식, 이름, 기억, 나와 닿은 사람들의 정보가 은색의 미세한 입자가 되어 피부로 침입했다. 부드러운 입자가 미세하게 진동하면서 체내로 빨려 들어왔다. 많은 생각이 둥둥 떠다니는 입자가 되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 타인의 진동에 감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육 여기저기가 잡다한 진동으로 경련했다. 제어할 수 없었다. 내 몸 속에 많은 타인이 있다.’     


‘피부 표면이 1미터는 넓어진 것 같았다. 무수한 진동을 피부가 빨아들였다. 나는 안테나가 되어있었다. 신체 감각이 팽창하여 거대한 수용체가 되었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주파수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제어할 수 없다. 마치 고장난 라디오처럼.’     


‘무수한 진동 속에서 문득 오빠를 느꼈다. 그리고 오빠의 시점에서 어린시절부터 오빠가 느껴온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오빠가 자기에게 나타나는 이유는 샤먼으로서의, 콘센트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임을 깨닫는다.’     


리츠코와 대화하면서 유키는 리츠코 자신이 샤먼이 되고 싶어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신기가 있는 것 같은 유키에게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놀랍게도 리츠코는 야마기시의 아내였다. 남편이 유키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질투심에 불타면서도 유키를 돕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키는 마지막으로 구니사다를 찾아가서 이제 괜찮아졌기 때문에 카운슬링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자아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면서 무의식 속에 있는 데이터를 언어화, 시각화, 음성화하게 되면 인간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예요. 하지만 단 한가지 아직 그 변환 방법이 밝혀지지 않았어요. 사실은 무의식이란 것은 하나의 단말기인데 어딘가에 있는 중앙컴퓨터와 접속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 중앙컴퓨터와 접속할 수 있는 매뉴얼이 없다는 거예요.’      


유키는 구니사다에게 접속해서 그에 대해 파악하려 해본다. 관계를 가지면서 유키는 그를 이해하게 된다.   

  

‘교수님은 제게 버림받고 나서 모친에게 두 번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분명 교수님의 모친께서는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그 한이 마음에 남아있는 거예요.‘     


유키는 그의 상처받은 기억을 치유하는 데 정신을 집중한다. 에너지는 미움과 슬픔, 고통을 홀려버릴 정도로 그의 몸에 채워졌고 구니사다는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면서 행복해했다.     


유키는 유타라고 부르는 샤먼들의 공동체를 찾아 오키나와로 떠난다. 유키를 만난 유타 미요는 트랜스 상태에 빠지기 위해 무릎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누군가를 부르는 노래였다. 미요에게는 의식이 없었고 그녀는 완전한 트랜스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 맞아, 빙의 인격으로 진동을 변환하는 것은 필시 그녀의 자아가 이 변환작업에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인지도 몰라. 그래서 다른 인격을 빌리는 거야. 그런 식으로 이 무시무시한 땅의 에너지를 변환해서 사람들의 플러그에 보내는 거야.‘     


미요는 유키의 오빠를 위한 진혼 의식을 거행한 뒤 이렇게 말한다.  

    

’제가 당신에게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은 아주 새로운 생명이에요. 우리와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오랜 자연의 무녀라면 당신은 새롭게 태어난 지구의 무녀죠. 당신이 생각하던 것처럼 우리들 유타는 ‘신내림’이라는 의식을 가져요. 우리는 신내림이 없이 신과 열결되는 방법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아요. 앞으로 당신 같은 사람이 많이 태어날 거예요. 새로운 자연이 낳은 새로운 무녀에요. 그런데 죽은 오빠가 당신의 안내자가 된 것 같군요. 당신이 변하는 기회를 만들려고 이 땅에 강한 기억을 남기셨어요.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오빠가 남긴 진동에 감응해서 오빠의 환각을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진동을 이 지상에서 해방시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로도 유키는 시부야에 살고 있다.     


’이 거리에는 과거의 나 그리고 오빠 같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껍질을 쓰고 산다. 나는 나나 오빠 그리고 그들을 ‘콘센트’라고 부르고 있다. 콘센트는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감정에 쉽게 감응하기 때문이다. 콘센트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휩쓸리며 살고 있다. 콘센트는 이 세상과 다른 세계와 감응하는 능력을 가진 샤먼이다. 그런 사람들이 도시에는 많이 묻혀 있다.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내가 겪은 체험을 공개하자 아주 많은 콘센트들이 접속했다.‘     


유키의 집으로 손님들이 찾아오면 유키는 그들과 접속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방문객의 물음에 유키는 대답한다.     


’왜일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많은 남자와 자는 것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여자의 음부가 세상을 바꿔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 남자에게 사기를 북돋아주었던 것도 이거였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침략자를 받아들여 새로운 혼혈을 만들고 세계를 계속 통합시키고 있는 것도 여기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이 세계의 콘센트라고 할 수 있죠. 에너지의 공급선이랄까.‘      


’이 남자는 내 속에서 어떤 관능을 떠올리게 될까. 나는 생각만 해도 젖는 것 같았다. 이제 콘센트를 꽂을 시간이다.‘     


이 책에 나오는 유키의 오빠에 대한 묘사가 너무도 리얼해서 이 소설은 실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알고 보니 이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었다. 다구치 란디의 오빠가 소설에서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었던 것이다.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역시 작가 자신의 가정을 묘사한 것이었다. 삶에 찌들어 영혼이 피폐해진 부모가 자식에게 폭력을 대물림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에는 각자의 이유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히키코모리들이 많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고 자신만의 외로운 섬에 갇혀버린 이들에게는 자신과 감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콘센트가 필요하다. 유키가 말한대로 파동은 모이거나 흩어지면서 특정한 주파수를 발산하는데 주파수가 다르면 전압이 맞지 않아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샤먼은 순간적으로 전파를 바꾸어 다른 세계와 공명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다른 언어를 해석하는 존재인 것이다. 샤먼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타인의 감정에 동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남과 같이 있으면 쉽게 지치고 녹초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아예 콘센트를 빼버리고 히키코모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유키와 그녀의 오빠 역시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잘 되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유키는 그 괴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객관적이고 냉정한 숫자의 세계로 도피한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타고난 재능을 살리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게 된다. 이후 유키는 자신을 찾는 손님들과 동침하면서 그들을 치유한다. 에로스적인 상상력이야말로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동력이며 에로스는 상대방과의 합일(concent)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기적인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