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미국 중산층이 사는 교외 주택가의 가상의 길 이름이다. 혁명을 뜻하는 이름과는 다르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먼, 껍데기뿐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주인공 에이프릴은 그 공허한 일상에 혁명을 일으켜보려다가 실패하고 파멸한다.
1955년 코네티컷주의 힐스테이트에는 ‘뉴욕의 의류매장에서 전원풍 캐주얼이라고 광고하는 매력적인 옷을 차려입은,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부류보다는 교육과 직업, 그리고 건강 면에서 더 나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월계수 극단'이라는 지역 사회 극단을 만들고 ‘화석 숲’이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로 한다.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배우들은 긴장한 나머지 연거푸 실수를 저지른다. 에이프릴 윌러 혼자 고군분투하지만 그녀도 얼마 안 가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연극은 수치스러울 만큼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여주인공을 맡은 에이프릴 윌러는 ‘10년도 채 안 된 과거 뉴욕의 일류 연극학교에 다녔고 스물아홉 살이며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큰 키에 은빛이 도는 금발의 미인’이었다. ‘아마추어 조명일지언정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일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에이프릴의 남편 프랭크는 맨해튼에 있는 사무용 기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않고 카페테리아에서 일하거나 부두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등 막노동을 전전해왔다. 지금까지 만난 평범한 여자들 말고 최고의 미모를 지닌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중에 파티에서 에이프릴을 보고 충동적으로 말을 건다. 놀랍게도 그녀는 선선히 그를 받아들였다. 에이프릴은 부모가 이혼한 뒤 친척들 사이를 전전하며 고독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 에이프릴이 임신하는 바람에 프랭크는 아버지가 일하던 바로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프랭크의 표현에 의하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겨운 일’을 하는 그 회사에. 그는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시간만 때우면서 비틀린 즐거움을 느낄 뿐이었다. 에이프릴과 프랭크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었다.
연극이 실패로 끝난 뒤 프랭크는 에이프릴을 위로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일종의 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위로의 말을 건넬 때마다 에이프릴은 내버려두라고만 할 뿐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랭크가 화를 내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싸움은 두 사람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다. 둘의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고 얼굴을 증오에 찬 표정으로 뒤틀어놓았다. 싸움은 두 사람을 더 세게, 더 깊게 부추겨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게 만들었다. 상대방의 안전한 요새 주위를 교활한 방법을 다양하게 써가며 맴돌다가 한순간에 전술을 바꾸어 짐짓 거짓 시늉을 보이면서 다시 치는 식이었다. 두 사람이 가쁜 숨을 돌리는 순간이면 싸움은 재빨리 기억을 과거의 몇 년으로 되돌려놓아 해묵은 상처 딱지를 뜯는, 오래된 무기를 사용하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싸움이 끝도 없어 이어졌다.
부부에게 집을 소개시켜 준 사람은 부동산 중개업자인 헬렌 기빙스 부인이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이웃에 사는 셰프 켐벨, 밀리 켐벨 부부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켐벨 부부는 헬렌의 아들이 미쳐서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 들려주었다. 정신병원에 갇힌 아들은 MIT 출신 수재로 서부의 어느 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일해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무슨 이유에서인가 정신병을 일으켜서 지금은 주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헬렌 기빙스 부인은 '힘든 노동이야말로 남자 그리고 여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지금까지 고안된 최고의 약'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항상 바쁘게 일했다. 헬렌의 남편 하워드 기빙스는 보험회사의 하급직원으로 평생을 일한 뒤 은퇴했다. 하워드는 자기 아내의 끝도 없는 장광설을 듣다가 보청기를 슬쩍 꺼버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때맞추어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미소를 지어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보청기를 꺼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헬렌 기빙스 부인은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 자기 아들 존을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존이 '취미나 성미가 맞고 민감한 제 또래 사람들과 어울리면 건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윌러 부부는 기빙스 부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교외에 있는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윌러 부부는 뉴욕에서의 무질서한 삶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었다. 그러나 새 집은 헬렌이 선물로 가져다준 바위솔을 심기에도 척박한 바위투성이 땅 위에 있었다. 프랭크는 새 집 마당에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자갈을 나르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다. 아이들이 다가와 돕겠다고 했지만 자기들끼리 노느라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진 프랭크는 아이를 들어올려 마당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아빠를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프랭크에게 만화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수줍게 부탁하는 아이들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자 그는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당연히 읽어줘야지."
그가 대답했다.
"여기 앉자, 우리 셋 다. 그리고 같이 만화를 읽는 거야."
소파 쿠션 위에 쭉 뻗은 가느다란 아이들의 다리가 자신의 다리와 닿아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양쪽 옆구리에 얼굴을 찰싹 붙인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만화를 읽어주는 동안 그는 감정이 복받쳐 목소리를 탁하지 않게 내기가 힘겨웠다.
그러나 만화를 읽은지 얼마 안 되어서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
두껍고 뒤죽박죽인 만화 면을 한 페이지씩 넘기는 일에 끝이 안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친 그의 목소리는 단조롭게 변했고 오른쪽 무릎도 조급증이 나서 아래 위로 흔들렸다.
(...)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치근에 달린 모든 신경이 두피의 신경과 한데 뒤엉켜서 따끔거리는 듯했다.
(...)
그는 자기 몸이 무기력하게 쿠션 속으로, 신문 더미와 아이들의 몸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흐르는 모래 속에 빠진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드디어 만화 면을 다 읽고 나자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조용히 숨을 씨근거리면서 몇 분 동안 양탄자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현듯 이 세상에서 자신이 진실로 간절히 하고 싶어진 일을 억지로 눌러 참는 몸짓이었다. 즉, 의자를 집어들어서 전망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인생이 이럴까? 대관절 이런 삶에 무슨 목적이나 의미가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그 나라에서도 중산층인 데다 대학까지 나온 고학력자, 외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다고 묘사된 이 젊은 부부는 절망에 빠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여유 있는 부류에 속하는 이런 사람들조차 '무슨 이 따위 삶이 다 있을까'하고 생각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반출생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고통은 삶의 조건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일례로 인간은 온도 변화에 민감해서 약간만 기온이 올라가도 에어컨 없이는 버틸 수가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디 한 군데 살짝 다치기만 해도 노동은커녕 아파서 정신을 집중하기도 힘들고 젊었을 때는 그나마 무탈하게 보낸다 쳐도 나이가 들면 몸 구석구석이 안 아픈 데가 없게 된다. 숨만 쉬어도 주민세, 임대료, 통신비, 보험금, 전기세나 가스비 같은 각종 세금들은 득달같이 뜯어가고 하루만 안 씻어도 견디기가 힘들 정도이며 지저분해도 매일 볼일을 보고 뒤처리까지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고 있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음식을 못 구하게 되면 처절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굶어죽어 가게 될 테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인간관계조차 평탄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전쟁인 경우가 훨씬 많다.
진통제도, 마취제도, 위생용품도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짝짓기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 노동력을 확보하고 성욕을 처리하고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이 겪었던 불편함을 태어날 아이에게 짬처리하면서 자기만족을 위해 이른바 폭탄 돌리기를 해왔던 것이다. 물려줄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도, 가진 거라곤 몸뚱어리밖에 없는 사람도, 그 몸뚱어리조차 성치 않은 사람도 누구나 다 번식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낳음 당한 아이에게는 효도와 감사를 맹목적으로 강요해왔고 한 발 더 나아가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다. 세계 최고 부자든 미국 대통령이든 살아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고 성가시고 불편한 일이다(일반인들보다야 훨씬 덜 고통스럽겠지만). 그러니 프랭크가 절망에 빠져서 무슨 이런 삶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고 해서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만은 없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관계는 복잡미묘하다. 두 사람은 헤어질 생각도 없고 헤어질 만큼 사이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주 싸우면서 불편하고 냉랭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프랭크는 자기도취적이고 피상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는데(그래서 이렇게 리뷰를 쓰는 내가 애써 프랭크를 지나치게 중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작가가 프랭크를 왜 그렇게 미워했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작가 자신이 이 책에 등장하는 셰프 캠벨의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프랭크를 미워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작을 각색한 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프랭크 역을 맡았다. 영화 속에서는 프랭크가 그렇게 나쁜 인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 속 프랭크는 나름대로 자기 할 일을 하려고 한다. 에이프릴은(배우는 케이트 윈슬렛) 사사건건 프랭크를 거부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에이프릴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에서는 에이프릴이 피상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랭크와의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자기 삶에 순응해버리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결말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에이프릴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체념이 싹 튼 결과였던 듯하다.
프랭크는 같은 회사 직원인 모린이라는 젊은 여성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앞서 들여다 본 것처럼 프랭크의 삶 역시 어딘가 공허하고 불행하다. 그 때문인지 불륜을 저지를 기회가 생기자 프랭크는 그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도 나르시즘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프랭크의 열망이 드러난다. 모린이 자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프랭크는 '기쁨에 도취되었으며 남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프랭크가 불륜을 저지르고 돌아온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과잉 친절을 베푸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는 모린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연극 대사 같고 과장된 열정을 담은 그 음성은 말을 한다기보다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이프릴은 프랭크에게 유럽으로 떠나자고 제안했다. 자신이 속기사로 일할 테니 가족을 부양하느라 더 이상 원치도 않는 일을 하지 말고 진짜 삶을 찾아서 떠나자는 것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계획, 직장동료도, 이웃 켐벨 부부도, 기빙스 부부도, 상식과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이 계획을 듣고 프랭크는 당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프릴은 계속해서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며 그를 설득한다. 프랭크는 조금쯤 얼떨떨한 마음에 그 계획에 찬성하고 만다.
기빙스 부부는 약속했던 대로 아들을 데리고 윌러 부부를 만나러 왔다. 기빙스 부부나 윌러 부부나 만남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존은 윌러 부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삶을 찾아 프랑스로 이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존은 그들이 떠나려는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프랭크가 ‘이 나라의 모든 것에 담긴 절망적인 공허’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존이 대답했다.
“우라질, 많은 사람이 그 공허 부분은 감지하고 있어요. 내가 일하던 저쪽, 서부에서 우리가 늘 얘기한 주제는 온통 그거였죠. 우리는 죽치고 앉아서 밤이 새도록 공허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러나 그 누구도 ‘절망적’이란 말은 한 적이 없어요. 그 지점에서는 겁이 나서 발뺌을 한 거죠. 공허를 보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그러나 절망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죠. 그런데 당신은 이제 그 절망을 제대로 본 것 같으니 떠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겠군요.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존은 껍데기뿐인 일상을 이어가는 미국 중산층의 삶을 경멸하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자기 부모, 특히 어머니인 헬렌 기빙스 부인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렇게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영민함 때문에 존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에이프릴이 계획에도 없던 셋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프랑스로 가려던 두 사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랭크가 모든 것을 포기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에이프릴은 중절 수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녀는 ‘멸균 소독한 고무 주사기와 소독한 소량의 물을 가지고' 유산하는 방법에 대해 말했었다. 프랭크는 그 말에 내심 솔깃했지만 자신의 남성성이 거부당한 느낌이 들어서 아이를 낳을 것을 강요했다. 며칠이나 다툰 끝에 에이프릴은 울면서 아이를 낳겠다고, 프랭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백기를 들었다. 그는 그 순간보다 자신의 남성다움을 멋지게 입증해 보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셋째를 가지자마자 에이프릴은 또다시 중절 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위험한 방법에 대해.
프랭크가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셋째를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당연히 낯선 삶을 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익숙하고 타성에 젖은 일상을 버리고 바깥으로 걸어 나갈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 의견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다시 냉랭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윌러 부부는 이웃의 켐벨 부부와 자주 만나 토론을 하거나 함께 클럽에 가는 사이였다. 셰프 켐벨은 에이프릴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셰프가 유혹해오자 셰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불륜을 저지른다. 사랑을 고백하는 셰프에게 에이프릴은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날 이후로도 셰프는 에이프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하지만 에이프릴은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때쯤 프랭크는 모린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에이프릴에게 자신의 내연관계에 대해 사죄하듯이 털어놓는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왜 당신이 그 여자를 취했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에요. 내 말은 왜 그 얘기를 내게 했느냐는 거예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그 말을 하면 내가 질투를 하거나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지거나 아니면 당신과 다시 잠자리를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면 뭐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냐고요?”
에이프릴은 자신이 프랭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월계수 극단의 ‘화석 숲’처럼 끔찍한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프릴은 더 이상 거짓되게 살아갈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려 할 때 기빙스 부부가 아들 존을 데리고 다시 집을 찾아 왔다. 셋째를 가져서 유럽으로 떠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존이 말했다.
“도대체 진짜 이유가 뭡니까? 마누라가 당신에게 그러지 말자고 설득했나요? 아니면 뭐죠?”
“저 귀여운 여인이 인형놀이를 그만둘 준비가 안 되었다고 결단을 내린 거예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난 알 수 있다니까. 저 여자는 아주 강건해 보여. 씩씩한 여성이고 지독하게 괜찮으니까. 그럼 좋아, 분명히 당신이 그랬겠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당신이 겁이 난 건가, 아님 뭐지? 결국 당신은 여기가 좋다고 결정한 거야? 요컨대, 여기 이 오래되고 절망적인 공허 속에서 사는 게 더 안락하다고 여긴 거야, 아니면 아아, 바로 그거였어! 이 얼굴 좀 봐! 윌러, 대체 뭐가 문제요? 내가 점점 더 대답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는 건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프랭크는 이성을 잃고 존에게 주먹을 날렸다. 당황한 기빙스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려는데 존이 말했다.
“이봐요, 한 가지 기쁜 게 있긴 하군요.”
문 근처에서 걸음을 멈춰 서더니 몸을 돌리고 다시 웃기 시작한 존이 노란 얼룩이 묻은 긴 집게손가락을 뻗쳐서 임신한 에이프릴의 봉긋하게 올라온 동그스름한 배를 가리켰을 때 기빙스 부인은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쁜 게 뭔지 알아요? 태어날 그 애가 내가 아니라는 게 기쁩니다.”
존이 가고 난 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다시 다투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저 사람 말이 맞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에이프릴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자는 미쳤어. 당신 미쳤다는 것의 정의가 뭔 줄 알지?”
“아뇨, 당신은 알아요?”
“알아. 그건 다른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무능력이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거지.”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는 그녀의 쭉 고른 두 줄의 치아가 앞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그녀가 방 안이 떠들썩하도록 웃어젖힐 때 빛나는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 무,” 그녀가 말했다. “그 무, 그 무능, 그 무능력이......”
그녀는 이성을 잃고 광란의 상태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웃었다. 몸을 비틀거리며 이 가구 저 가구를 짚어가며 벽 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웃고 또 웃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가 뭘 해야 될지 몰라 곤혹스러워졌다.
프랭크는 “나는 당신이 아이를 없애주기를 하느님께 빌었어.”라고 대꾸했다. '그것은 완벽한 탈출 경로였다'. 그 말을 내뱉음으로써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거부당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으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다. 셋째 아이뿐 아니라 첫째 아이도 그랬다. 그들은 그저 자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 결과로 아이가 생겼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에이프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달걀과 베이컨과 오렌지 주스로 프랭크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애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프랭크의 회사 일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친절함은 타성에 젖은 연기일 뿐이었다.
그녀의 미소는 부엌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침식사를 끝낸 접시를 세제 거품에 섞인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싱크대 안에 집어넣을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사실, 그녀는 컴퓨터 그림이 그려진 종이 냅킨을 보았을 때(에이프릴이 프랭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애정 어린 질문을 했을 때 프랭크가 자신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보여준 냅킨)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는 그냥 퍼져서 떨리다가 자꾸만 목이 아파와 경련이 시작되면서 딱딱하게 찡그린 표정 속에 갇혀버렸다. 그러자 눈물이 터져 나와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재빨리 그 눈물을 훔쳐낼 만큼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짧은 몇 마디 말을 프랭크에게 남겨 놓았다.
친애하는 프랭크,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발
당신 자신을 탓하지 마요.
자신도 모르게 오래 밴 습관 때문에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덧붙일 뻔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냥 평범하게 ‘에이프릴’이라는 서명을 덧붙였다.
에이프릴은 습관적으로 마지막까지 프랭크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뱃속의 아이를 없애리라고 결심한 뒤였다. 그리고 그 일의 결과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알고 있던 것을 깨달은 지금의 그녀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녀의 부모도, 클레어 아주머니도, 프랭크도, 혹은 다른 누구도 그녀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없던 그것을 자신은 알았다. 즉,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홀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에이프릴은 주사기로 임신 중절을 시도하다가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셰프는 에이프릴에게 거부당한 뒤 자신이 무가치해진 것 같은 참담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에이프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에 잠기면서도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유능해진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으로 나와 전력을 다해 차를 세워둔 자리로 질주하면서, 질주하는 동안 바람에 펄럭이는 재킷을 입으면서 셰프는 윙윙대며 귓가를 스치는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활기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옛날 전투에 나서던 때의 기분 같았다. 모든 요소가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상황에서 정당한 일을 민첩하게 잘해 내는 듯한 기분.
패닉에 빠진 프랭크는 켐벨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오늘 아침에 지독하리만치 다정했어요.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일이 있을까요? 그녀가 메모를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미쳐버렸을 겁니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이 이미 계획을 다 세워두었으면서 자신에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서도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한 메모를 남겨놓은 것을 보고 상처 받은 자존심에 한 줌 위안을 얻었던 듯하다.
에이프릴이 죽고 난 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도 이웃 사람들은 켐벨 부부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때마다 켐벨 부부는 그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가을 겨울 동안에는 셰프도 이 과정을 즐겼지만 봄이 되자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내 밀리가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브레이스 부부에게 이 일을 설명할 때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밀리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관능적인 쾌락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볼 유리잔의 가장자리 너머로 밀리를 바라보며 셰프는 그녀가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 얘기로 큰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밀리는 타인의 불행을 자기 행복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중이었다.
헬렌 기빙스 부인은 남편 하워드에게 윌러 부부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내의 끝도 없는 장광설에 지친 하워드는 슬그머니 보청기를 꺼버린다. 결국 진정한 소통은 일어나지 않고 공허한 존재들이 몸서리쳐지는 고독을 달래보고자 필사적으로 떠들어대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과 줄거리 전개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지만 소설은 인생의 고통스러운 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잔혹할 정도로 비극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지금이야 고통스러운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들이 많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시대를 앞서 간 면이 있었다.
셰프 캠벨과 밀리 캠벨은 겉으로는 좋은 이웃이자 지성인이지만 미국 중산층의 껍데기뿐인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치로서 존재한다. 그 지성의 껍데기 아래에서 셰프 캠벨은 이웃의 아내를 탐하고 있다. 겉으로는 완벽한 한 쌍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언제든지 아내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셰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지 못하는 등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었는데 에이프릴이 죽은 뒤 프랭크를 도우면서 다시 남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고 상황을 통제하는 듯한 자존감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셰프 캠벨이 가짜 지성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들 부부는 한 동안 프랭크의 아이들을 맡아주는 등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밀리 캠벨 역시 겉으로는 지적인 여자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에이프릴의 미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에이프릴을 좋아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며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에이프릴이 등장한 뒤 밀리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친절하게 행동하면서도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에이프릴이 죽고 난 뒤 밀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한다.
에이프릴이 죽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프랭크는 켐벨 부부를 다시 한 번 더 방문했다. 프랭크는 완전히 영혼 없는 인간이 되어 '정신 분석' 같은 피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나 지루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셰프는 그 본질에서 벗어난 허황된 몸부림에 화가 치밀어올라 술을 마시고 집 마당으로 걸어 나와 버렸다. 봄 향기가 나는 대기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그는 에이프릴의 미소와 그녀의 음성을 떠올렸다. 셰프는 주먹 쥔 손을 입에 넣고 따뜻한 눈물이 주먹 위로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우는 게 너무 쉽고 기분도 너무 좋아진다는 걸 깨달았기에 한동안은 울음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흐느끼는 소리를 억지로 내려 하고 있다는 것을, 불필요할 정도로 몸서리를 치면서 그 울음의 농도를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자 그는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몸을 구부려 술잔을 잔디밭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에이프릴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셰프는 진실이 아닌 것, 과장된 것, 거된짓 위안을 주는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프랭크가 정신 분석 같은 변죽만 울려대는 엉터리 열변을 토하거나 밀리가 에이프릴의 죽음에 대해 연극적인 제스처를 곁들여 설명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행위이다.
"아니에요. 하지만 난 정말로 그 경험이 우리 두 사람을 한층 더 가깝게 해주었다고 믿는답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셰프와 나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그러자 브레이스 부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밀리의 질문을 반복하는 표정이었다. 그랬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았을까?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당연히, "응, 그렇지. 정말 그랬지"였다.
그리고 우스운 점은, 그가 문득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습게도 그 말이 자신의 진심이었다. 지금 전등 불빛 아래 밀리를 바라보며, 머리가 헝클어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어리석은 이 작은 여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한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염병할 일이지만, 그녀는 살아 있으니까. 그렇지 않은가? 그가 지금 당장 그녀가 앉은 의자 쪽으로 다가가 목덜미를 어루만져준다면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미소 지을 것이다.
(...)
그리고 아침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구부리고 뜯어진 실내복, 잠 냄새와 오렌지 주스와 기침약 시럽과 오래된 방향제 냄새를 두루 풍기는 실내복을 걸치고서 또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셰프 켐벨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는 어리석은 아내라 해도 저 여자만은 살아서 자기 곁에 있어줄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은 헬렌 기빙스 부인이 노동으로 도피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기제라고 볼 수 있다. 헬렌 기빙스 부인은 너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바쁘게 일한다. 생각을 하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 노동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그녀는 역설한다.
그렇게 얄팍한 방식으로 존재의 고통을 이겨내 보려 하는 헬렌 기빙스는 당연히 주변적인 것, 쓸데 없는 것, 사소한 가십거리에 대해 떠들어댈 뿐이다. 하워드는 아내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말들은 별로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심이 아닌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역시 이런 도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이유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해버렸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에이프릴과 그녀의 바람, 그녀의 심리 상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맞아서, 서로의 환상을 투영한 결과가 결혼으로 이어졌다. 에이프릴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이면에 상당한 내적 갈등과 지성을 감추고 있다. 평범한 남자나 평범한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다루기 쉽지 않은 자의식 강한 여자다.
에이프릴 역시 딱히 어떤 각성 없이 그저 도피하듯이 결혼했다. 각성하기 전까지 에이프릴은 인생의 대소사를 매사에 이런 식으로 결정하곤 했다. 결혼과 연이은 출산,심지어 불륜까지도. 이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 유일하게 정직한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척 두렵고 고독한 길이었고(에이프릴은 중절 수술을 시도하기 전에 밤을 지새며 재떨이가 가득 찰 만큼 담배를 피우고 또 피우면서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혁명의 길을 걸어 간 사람은 에이프릴 밖에 없었다. 존의 말대로 '공허를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절망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