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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05. 2023

레볼루셔너리 로드 - 리처드 예이츠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 중에서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미국 중산층이 사는 교외 주택가의 가상의 길 이름이다. 혁명을 뜻하는 이름과는 다르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진짜 삶과는 거리가 먼, 껍데기뿐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주인공 에이프릴은 그 공허한 일상에 혁명을 일으켜보려다 실패하고 파멸한다. 


1955년 코네티컷주의 힐스테이트에는 ‘뉴욕의 의류매장에서 전원풍 캐주얼이라고 광고하는 매력적인 옷을 차려입은,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부류보다는 교육과 직업, 그리고 건강 면에서 더 나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 거주민들은 월계수 극단이라는 지역사회 극단을 만들고 ‘화석숲’이라는 연극을 공연한다.


극단은 ‘아마추어지만 격이 있고 대단히 진지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연극이 시작되자 배우들은 긴장한 나머지 계속해서 실수를 저지른다. 에이프릴 휠러 혼자 고군분투하지만 그녀도 얼마 안 가 중심을 잃고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연극은 떠올리기 수치스러울 만큼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 


여주인공을 맡은 에이프릴 휠러는 ‘10년도 채 안 된 과거 뉴욕의 일류 연극학교에 다녔고 스물아홉 살이며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큰 키에 은빛이 도는 금발의 미인’이며 ‘아마추어 조명일지언정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일그러뜨릴 수는 없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에이프릴의 남편 프랭크는 맨해튼의 사무용 기계 회사 다니고 있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나온 프랭크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않고 카페테리아에서 일하거나 부두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등 막노동을 전전한다. 지금까지 만나온 평범한 여자들 대신 최고의 미모를 가진 일류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중 파티에서 에이프릴을 보고 충동적으로 말을 건다. 그녀는 놀랍게도 선선히 그를 받아들인다. 에이프릴은 부모가 이혼한 뒤 아주머니들 사이를 전전하며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다 에이프릴이 임신하는 바람에 프랭크는 아버지가 일하던 바로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프랭크의 표현에 따르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겨운 일’을 하는 회사에. 그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그저 시간만 때우면서 비틀린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에이프릴과 프랭크에게는 이미 두 명의 자녀를 있었다. 

연극이 실패로 끝난 뒤 프랭크는 에이프릴을 위로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며 도취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위로의 말을 건넬 때마다 때 에이프릴은 내버려두라고만 할 뿐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랭크가 화를 내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싸움은 두 사람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다. 둘의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고 얼굴을 증오에 찬 표정으로 뒤틀어놓았다. 싸움은 두 사람을 더 세게, 더 깊게 부추겨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게 만들었다. 상대방의 안전한 요새 주위를 교활한 방법을 다양하게 써가며 맴돌다가 한순간에 전술을 바꾸어 짐짓 거짓 시늉을 보이면서 다시 치는 식이었다. 두 사람이 가쁜 숨을 돌리는 순간이면 싸움은 재빨리 기억을 과거의 몇 년으로 되돌려놓아 해묵은 상처 딱지를 뜯는, 오래된 무기를 사용하도록 부추겼다. 그렇게 싸움이 끝도 없어 이어졌다.‘ 


부부에게 집을 소개시켜 준 사람은 부동산 중개업자인 헬렌 기빙스 부인이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이웃에 사는 셰프 켐벨, 밀리 켐벨 부부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켐벨 부부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 헬렌의 아들이 미쳐서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헬렌의 아들은 MIT에서 공부한 수재로 서부의 어느 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일했다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병을 일으켜서 지금은 주립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헬렌 기빙스 부인은 ’힘든 노동이야말로 남자 그리고 여자의 질병을 치료하는 지금까지 고안된 최고의 약‘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항상 바쁘게 일했다. 남편 하워드 기빙스는 보험회사의 하급직원으로 평생을 일한 뒤 은퇴했다. 자기 아내의 끝도 없는 장광설을 듣다가 그는 슬쩍 보청기를 꺼버리곤 했다. 항상 때맞추어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미소를 지어 보였기 때문이에 그녀는 그가 보청기를 꺼버렸다는 사실을 모르곤 했다. 


어느 날 기빙스 부인은 휠러 부부에게 자기 아들 존과 만나주기를 부탁한다. 그녀는 존이 ’취미나 성미가 맞고 민감한 제 또래 사람들과 어울리면 건강을 되찾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휠러 부부는 기빙스 부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프랭크는 이 두꺼운 소설 전반에 걸쳐 이상할 정도로 진짜 남자의 모습, 남성성에 집착한다. 어렸을 때 그가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느낌도, 뉴욕의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묘사도 그렇다.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표정을 지으면 남자 같아 보일 것 같다는 식의 자기도취적 행동이 프랭크에 대한 묘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 처녀 모린과도 불륜을 저지른다. 그런데 여기서도 나르시즘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드러난다. 모린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에 도취되었으며 남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이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프랭크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남자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뒤쪽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바지의 무릎에 주름이 생기지 않을까 까다롭게 자세를 정돈하면서, 옆 사람이 팔을 움직일 수 있도록 석간신문을 좁다랗게 접어들고 읽으면서 오면 어떨까? (...)

무슨 소린가! 절대로 안 되었다. 남자가 차를 타는 방식은 몸을 곧추세우고 밖으로 나와서 시끄러운 철제 통로에 서는 것이었다. 바람이 넥타이를 후려칠 때 철커덕 금속성 소리를 내는 바닥판 위에서 다리를 쩍 벌린 채 흔들리며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타들어 가던 담배 개비의 끝이 불타는 바늘이 되었다가 종이재로 흔들리고 이내 손가락에 끼웠던 담배 개비가 철도 노반이 휙휙 사라지듯 낚아채인 총알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때까지, 그러다 보면 교외 주택가 마을들이 가차 바퀴를 따라 서서히 분홍과 회색이 섞인 오후 7시의 흙먼지를 타고 나타났다. 내릴 정거장에 다다랐을 때 남자로서 기차에서 내리는 자세는 철제 발판을 디디고 몸을 흔들면서 기차가 멈추기 전에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뛰어내린 뒤에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느긋하고 씩씩하게 활보해서 주차해 놓은 자기 자동차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불륜을 저지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생일 축하를 위해 파티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날 따라 과잉친절을 베푸는 에이프릴의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모린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연극 대사 같고 과장된 열정을 담은 이 음성은 그에게 말을 한다기보다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두 아이와 같이 생일파티를 마친 뒤, 에이프릴은 프랭크에게 유럽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원치도 않는 일을 하는 걸 그만두라고. 자신이 유럽에서 속기사로 일자리를 구해볼 테니 이 껍데기뿐인 삶을 벗어나서 진짜 삶을 찾아 떠나자는 것이었다. 이 비현실적인 계획, 직장동료도, 이웃 켐벨 부부도, 기빙스 부부도, 상식과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이 계획을 듣고 프랭크는 당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계속해서 당신은 최고의 남자이며, 이토록 뛰어난 사람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며 그를 설득한다. 프랭크는 조금쯤 얼떨떨한 마음에 그 계획에 찬성하고 만다. 


기빙스 부부는 약속했던대로 아들 존을 데리고 휠러 부부를 만나러 왔다. 기빙스 부부나 휠러 부부나 만남 전에는 무척 긴장했지만 놀랍게도 존은 휠러 부부에게 대단한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삶을 찾아 프랑스로 이주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존은 그들이 떠나려는 이유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프랭크가 ‘이 나라의 모든 것에 담긴 절망적인 공허’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존이 말했다. 


“우라질, 많은 사람이 그 공허 부분은 감지하고 있어요. 내가 일하던 저쪽, 서부에서 우리가 늘 얘기한 주제는 온통 그거였죠. 우리는 죽치고 앉아서 밤이 새도록 공허에 대해 얘기했어요. 그러나 그 누구도 ‘절망적’이란 말은 한 적이 없어요. 그 지점에서는 겁이 나서 발뺌을 한 거죠. 공허를 보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그러나 절망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죠. 그런데 당신은 이제 그 절망을 제대로 본 것 같으니 떠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겠군요.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존은 본질로 들어가지 못하고 껍데기뿐인 삶을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의 삶을 경멸했고, 같은 이유로 자기 부모, 특히 어머니인 헬렌 기빙스 부인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영민함 때문에 사회 부적응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이프릴이 계획에 없던 셋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프랑스로 가려던 두 사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프랭크가 모든 걸 포기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에이프릴은 중절수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도 그녀는 ‘멸균 소독한 고무 주사기와 소독한 소량의 물을 가지고‘ 유산하는 방법에 대해 말했고 프랭크는 이 말에 내심 솔깃했지만 자신의 남성성이 거부당한 느낌이 들어 아이를 낳을 것을 강요했었다. 며칠이나 다툰 끝에 에이프릴이 울면서 아이를 낳겠다고, 프랭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백기를 들었다. 그때 그는 ’그 순간보다 자신의 남성다움을 멋지게 입증해 보인 것이, 거기에 무슨 증거가 필요하다면, 생애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길들여진 순종적인 여자를 안고서 오, 내 사랑, 오 내 사랑!하고 말할 때 그녀가 자기 아이를 낳겠다고 맹세를 하는 그 순간.‘ 그런데 셋째를 가지자 그녀가 다시 중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것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위험한 방식에 대해. 프랭크가 떠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셋째를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당연히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익숙하고 타성에 젖은 삶을 걸어 나갈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이런 의견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다시 냉랭하고 불편한 나날을 보냈다. 


휠러 부부는 이웃의 켐벨 부부와 자주 만나 토론을 하거나 클럽에 함께 가는 사이였다. 셰프 켐벨은 사실 아름다운 에이프릴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었다. 처음부터 프랭크를 사랑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스스로를 기만해온 에이프릴은 셰프와 불륜을 저지른다. 사랑을 고백하는 셰프에게 에이프릴은 당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날 이후로도 셰프는 지속적으로 에이프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하지만 에이프릴은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한편 모린과의 관계를 정리한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자신의 내연관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왜 당신이 그 여자를 취했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에요. 내 말은 왜 그 얘기를 내게 했느냐는 거예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그 말을 하면 내가 질투를 하거나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당신과 사랑에 빠지거나 아니면 당신과 다시 잠자리를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면 뭐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냐고요?” 


그녀는 자신이 프랭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거짓되게 살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월계수 극단의 ‘화석숲’ 공연처럼 끔찍한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시 싸움을 벌이려 할 때 기빙스 부부가 아들 존을 데리고 다시 집을 찾아 왔다. 셋째를 가져서 유럽으로 떠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존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늘 좋은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이유인 적은 거의 없어요. 도대체 진짜 이유가 뭡니까? 마누라가 당신에게 그러지 말자고 설득했나요? 아니면 뭐죠?”

“저 귀여운 여인이 인형놀이를 그만둘 준비가 안 되었다고 결단을 내린 거예요?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난 알 수 있다니까. 저 여자는 아주 강건해 보여. 씩씩한 여성이고 지독하게 괜찮으니까. 그럼 좋아, 분명히 당신이 그랬겠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당신이 겁이 난 건가, 아님 뭐지? 결국 당신은 여기가 좋다고 결정한 거야? 요컨대, 여기 이 오래되고 절망적인 공허 속에서 사는 게 더 안락하다고 여긴 거야, 아니면 아아, 바로 그거였어! 이 얼굴 좀 봐! 휠러, 대체 뭐가 문제요? 내가 점점 더 대답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는 건가?”

“아아! 당신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임신시켰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요. 그래야만 당신은 남은 생을 저 임부복 자락 뒤에 숨어서 보낼 수 있을 테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프랭크는 이성을 잃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존은 이렇게 말한다. 


“에이프릴, 당신은 이 집에 대단한 인물을 모시고 살고 있군요.”

“대단히 가정적인 남자, 견실한 시민. 당신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더라도 어쩌면 당신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울리는 운명일지 모르죠.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프랭크, 당신 표정을 보니 당신 역시 안됐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하는군요.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에이프릴 당신이 남편을 꽤 못살게 구는 게 틀림없어요. 아기를 만드는 게 프랭크로서는 자신에게 불알 두 쪽이 있다는 걸(balls는 불알이란 뜻 외에 용기나 배짱이라는 뜻도 있음-옮긴이)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말이지요.” 


당황한 기빙스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얼른 집을 떠나려는데 존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봐요, 한 가지 기쁜 게 있긴 하군요.”

문 근처에서 걸음을 멈춰 서더니 몸을 돌리고 다시 웃기 시작한 존이 노란 얼룩이 묻은 긴 집게손가락을 뻗쳐서 임신한 에이프릴의 봉긋하게 올라온 동그스름한 배를 가리켰을 때 기빙스 부인은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쁜 게 뭔지 알아요? 태어날 그 애가 내가 아니라는 게 기쁩니다.” 


존이 가고 난 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다시 다투기 시작한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에게 저 사람 말이 맞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에이프릴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자는 미쳤어. 당신 미쳤다는 것의 정의가 뭔 줄 알지?”

“아뇨, 당신은 알아요?”

“알아. 그건 다른 인간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무능력이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거지.”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는 그녀의 쭉 고른 두 줄의 치아가 앞으로 튀어나와 보였다. 그녀가 방 안이 떠들썩하도록 웃어젖힐 때 빛나는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 무,” 그녀가 말했다. “그 무, 그 무능, 그 무능력이......”

그녀는 이성을 잃고 광란의 상태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웃었다. 몸을 비틀거리며 이 가구 저 가구를 짚어가며 벽 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웃고 또 웃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가 뭘 해야 될지 몰라 곤혹스러워졌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미쳤다는 거군요. 맞아요?” 


분노한 프랭크는 “나는 당신이 아이를 없애주기를 하느님께 빌었어.”라고 대꾸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한 탈출 경로였다‘. 그 말을 통해 자신이 거부당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으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한 것이다. 또한 프랭크는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게 사실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에이프릴이나 프랭크나 결코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다. 셋째 아이뿐 아니라 첫째 아이도 그랬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 결과로 아이가 생겼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에이프릴은 마치 간밤의 싸움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를 위해 달걀과 베이컨과 주스로 정성들여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심지어 애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그가 요즘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친절함이 그저 타성에 젖은 연기일 뿐임은 다음 단락에서 자명해진다. 


그녀의 미소는 부엌으로 돌아온 뒤에도, 아침식사를 끝낸 접시를 세제 거품에 섞인 수증기가 솟아오르는 싱크대 안에 집어넣을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사실, 그녀는 컴퓨터 그림이 그려진 종이 냅킨을 보았을 때(에이프릴이 프랭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애정 어린 질문을 했을 때 프랭크가 자신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 보여준 냅킨)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는 그냥 퍼져서 떨리다가 자꾸만 목이 아파와 경련이 시작되면서 딱딱하게 찡그린 표정 속에 갇혀버렸다. 그러자 눈물이 터져 나와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그녀가 재빨리 그 눈물을 훔쳐낼 만큼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짧은 몇 마디 말을 프랭크에게 남겨 놓았다. 


친애하는 프랭크,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발

당신 자신을 탓하지 마요. 


자신도 모르게 오래 밴 습관 때문에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덧붙일 뻔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냥 평범하게 ‘에이프릴’이라는 서명을 덧붙였다. 


에이프릴은 그저 그렇게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프랭크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뱃속의 아이를 혼자 없애리라고 결심한 뒤였다. 그리고 이 일의 결과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알고 있던 것을 깨달은 지금의 그녀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녀의 부모도, 클레어 아주머니도, 프랭크도, 혹은 다른 누구도 그녀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없던 그것을 자신은 알았다. 즉,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홀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국 그녀는 혼자서 주사기로 임신중절을 시도하고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한편 에이프릴에게 거부당한 뒤로 셰프는 자신이 무가치해진 것 같은 참담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에이프릴이 죽었다는 얘기를 듣자 비탄에 잠기면서도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유능해진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으로 나와 전력을 다해 차를 세워둔 자리로 질주하면서, 질주하는 동안 바람에 펄럭이는 재킷을 입으면서 셰프는 윙윙대며 귓가를 스치는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활기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옛날 전투에 나서던 때의 기분 같았다. 모든 요소가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상황에서 정당한 일을 민첩하게 잘해 내는 듯한 기분.’ 


패닉에 빠진 프랭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오늘 아침에 지독하리만치 다정했어요.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일이 있을까요? 그녀가 메모를 남겨놓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미쳐버렸을 겁니다” 


프랭크는 에이프릴이 이미 그 계획을 세워두었으면서도 자신에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었고, 그러면서도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메모를 남겨놓은 것을 보고 상처 받은 자존심에 한 줌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에이프릴이 죽고 난 뒤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새롭게 봄이 왔다. 이웃 사람들은 켐벨 부부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때마다 켐벨 부부는 그들이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가을과 겨울 동안 셰프는 이 과정을 즐겼으나 봄이 되면서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내 밀리가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브레이스 부부에게 이 일을 설명할 때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밀리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관능적인 쾌락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볼 유리잔 가장자리 너머로 밀리를 바라보며 셰프는 그녀가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 얘기로 큰 쾌감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밀리는 휠러 부부와 친구였지만 타인의 불행을 자기 행복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밀리의 표현에 의하면 그 뒤 프랭크는, ‘생명력 없이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으며 회사와 사회 질서 속에 편입되어 유순하고 따분한 존재로 살아간다. 


한편 기빙스 부인은 새로 이사온 브레이스 부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휠러 부부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었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끝도 없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아내의 말에 지쳐 하워드 기빙스는 보청기를 꺼버린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진정한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존재들이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고독을 달래보고자 필사적으로 번지르르하게 떠들어대는 목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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