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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16. 2023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영화 '인간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위와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일생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것. 얼굴도 미남이고 공부도 잘한 것. 유머 감각이 뛰어나 인기가 많았고 만나는 여자마다 반하게 만드는 바람에 이 여자 저 여자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생활비를 우려먹은 것. 심지어 문학과 미술에도 재능을 보여 만화작가 생활을 하기도 한 것. 그런데도 그는 삶이 너무 끔찍해서 계속 자살 시도를 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너무 무서웠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종종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나는 언제나 지옥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락해 보였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생로병사에 몸부림치며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도 없이 짓밟고 물고 뜯는 무간지옥,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피상적인 사람들 틈에서 요조는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데 비해서는 용케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는다. 정당을 논하고, 절망하지 않고, 굴하지 않고 삶의 투쟁을 계속한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완전히 이기주의자가 되어,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확신한 채 한 번도 자신을 의심한 적이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그렇게 살면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돈? 설마 그것만 생각하지는 않겠지. 인간은 밥을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러나 어쩌면..... 아니다, 그래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 없고, 나만 아주 특이한 사람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만 밀려올 뿐입니다. 나는 주변 사람과 대화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깊이 사고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책이 아니라 장난감을 선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언젠가 도쿄에 가기 전날 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랑방에 모아놓고, 이번에 돌아올 때는 어떤 선물을 사줄까.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역시 책이냐?”     

‘아버지는 흥이 식은 얼굴로 메모도 하지 않고 수첩을 탁 덮었습니다.

이게 무슨 실수람. 아버지를 화나게 하다니. 아버지의 복수는 분명 무시무시할 거야.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돌이킬 수 없을까.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덜덜 떨면서 생각하던 끝에 슬그머니 일어나 사랑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까 수첩을 넣어둔 책상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 선물 목록을 기입한 페이지를 찾아낸 다음 연필에 침을 발라 사자탈이라고 쓰고 돌아와 잤습니다. 나는 사자탈이 조금도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책이 나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요조가 사자탈을 갖고 싶어 했으면서 말도 못 하고 몰래 수첩에다 적어놓고 간 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르겠다고 흐뭇해한다. 요조는 자신이 오락거리보다 책 같은 깊고 진지한 것을 좋아하는 별종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일종의 사회적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그 가면은 익살과 광대짓이었다. 일단 가면을 쓰기면 하면 모두가 하하호호 웃었다. 어떤 긴장된 사건도 행복한 결말로 끝났고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광대짓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나의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광대짓만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즉, 나는 어느샌가 한마디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책을 선택하면 싫어하고 장난감을 선택하면 좋아하는 부모라니...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도 저랬었다. 아버지는 내가 티비가 아니라 책을 보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셨다. 로알드 달이 어린이들을 위해 쓴 소설 ‘마틸다’에서 마틸다의 부모도 마틸다에게 책 말고 텔리(텔레비전)를 보라며 윽박을 지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요조가 왜 사회적 가면으로 광대짓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썼던 가면도 그것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그것의 이름은 ‘바보인 척하기’였다.      


아기나 동물은 인간 어른에 비하면 지능이 낮으면서 상당히 귀엽다. 백치미는 약간 모자란 듯한 존재의 순진함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다. 귀여운 동물이나 아기가 나오는 동영상은 국가의 정책이나 뉴스보다 훨씬 조회수가 높다. 정치는 따분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귀여운 건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정치에 대한 일본인의 무관심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인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특징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다. 반면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에 집착하는 나라도 일본이다. 일본인들은 카와이(可愛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눈이 얼굴의 반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들고 여자들은 돌고래 같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아기 말투를 사용한다. 구어 문어 할 것 없이 말의 표현도 퍽 여성적이고 완곡하다. 이 같은 완곡어법(이를 테면 그 유명한 교토식 화법)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모호하게 돌려 말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며 발뺌할 수 있고 반대로 결과가 좋을 때는 생색을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회피한다. 책임지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해도 초식적이어서 성취보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인지 책임지는 행위의 정수라고 볼 수 있는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고 천년 넘게 같은 왕조가 유지되기도 했다. 지역구 내 의원직도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는 곳이 많은데 작은 지방 도시는 철저하게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실상 지방 토호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도 비슷하긴 하지만 일본에 비하면 그 정도가 다소 약하다.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내가 바보짓을 하기 시작한 이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바보짓을 하게 된 건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요조가 익살이라는 가면을 쓴 것처럼 나는 유아 퇴행을 일으킨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떤 어른도 유아에게 어른과 같은 수준의 책임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범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 어렵고 복잡한 일이 있으면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일을 시켜본들 무능해서 해낼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세상의 무책임한 인간들보다 더 무책임해지기 위해, 의무를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바보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청소를 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자기 차례가 돼도 안 하는 사람은 안 했다. 선생님은 누가 청소를 하는지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냥 청소가 되어 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책임에도 관성이 있는지 책임지는 사람만 늘 책임을 졌다. 수업시간에 누가 떠들면 선생님은 당사자를 혼내기보다는 반 전체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너희 반은 수업 태도가 왜 그 모양이야’로 시작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히스테리. 운이 나빠서 앞자리에 앉았을 때는 선생님이 화를 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작 떠든 친구들은 신경이 두꺼워서인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보란 듯이 또 떠들어대곤 했다.      


청소를 안 한다거나 수업시간에 떠드는 따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일로 화가 난 적도 없고 사회가 강제하는 룰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종의 경향성 혹은 유전적 법칙 같은 것을 깨달았으며 그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날 때부터 책임에 대한 감각이 희박한 친구들은 대개 천진난만했다. 그들은 구속, 책임, 의무, 헌신 같은 것들에 대해 비교적 가벼운 태도를 취했다. 하기 싫은 일은 어린아이처럼 내팽개쳐버리고 즐거움을 쫓으며 살았다. 머릿속에 즐거운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웃었다.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누군가가 웃으면 옆에 있는 사람도 좋은 향기를 맡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기분이 명랑해지는 것 같았다. 청소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지만 전반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잘 산다는 법칙은 어린 시절에도 예외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그 친구들보다 더 천진난만하게 굴면서 청소를 그만둬버렸다. 그 뒤로는 종종 아기처럼 행동했다. 실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좀 모자라거나 어리바리한 구석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것이 뻔한 연기라거나 아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선천적으로 단순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삶이 상당히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모두가 나를 보면 모성애에서 우러난 미소를 짓곤 했다. 좀 약은 사람이라면 이런 특징을 이용해서 남에게 무언가를 뜯어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돈을 갖기 위해서는 온갖 악마 같은 짓을 마다 않지만 한편으로는 남에게 돈을 뜯어가는 진실성 없는 존재에게는 속수무책으로 이끌리게 마련이다. 하나의 유전적 특징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되면, 그런 이기적인 유전자가 집단 속에 널리 퍼지게 되면 그런 유전자를 배재하려는 압력보다 선택하려는 압력이 더 커진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밝힌 연구 내용이었다.    

  

귀여움에 집착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형성숙(neoteny)이 많이 이루어진 동북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먼 옛날 인간끼리 생존 경쟁이 심해졌을 때 어떤 유전자가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이 피땀 흘려 일해놓으면 뒤통수 쳐서 그 공을 가로챈 인간들, 겉은 부드러워도 속은 음흉한 무책임한 기생충들이 득세한 게 분명했다. 나는 인간이라는 양아치들을 위해 무언가를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기나 동물을 보면 귀여우면서도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것은 조현병 환자나 치매 환자를 접했을 때 느끼는 공포심 같은 것이었다. 치매 환자들도 한때는 분명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기도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리분별도 못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존엄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각성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것대로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언제나 내 의식의 온전한 주체이고 싶었다. 잘 때 나는 내 의사와는 무관한 논리도 맥락도 없는 꿈을 꾼다. 잘 때는 내 의식이 아닌 것이다. 그것만 생각해도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비참한 존재다.     


소설 속의 요조는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고 죽음을 갈망한다. 나도 어릴 때부터 죽는 것만이 유일한 소원이었다. 타인들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좀비와도 같았고 그 명령에 충실한 인간일수록. 각성하지 않을수록, 천박할수록 더 잘 살았다. 너무도 가볍고 관심사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 틈에서 완전히 혼자인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소설 1984에서 모든 것이 통제된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 당이 날조해내는 거짓에 속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세 눈 도깨비 나라에 떨어진 두 눈 도깨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조도 이와 유사한 공포를 느낀다.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만으로 아웃사이더 특유의 겉도는 기운을 발산하게 되는데 유전자의 노예들은 그런 사람을 색출해내는 제3의 감각이라도 있는 것 같다. 요조의 아버지가 책을 선택한 요조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요조는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자탈을 좋아한다고 거짓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소러’라든가 ‘가처’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보내는 스팸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로봇이 메일을 자동생성하면서 발신자 이름도 무작위로 생성한 것이었다. 단어가 아닌 단순한 두 글자의 조합에 불과한 그것들이 나는 무서웠다. 정상적인 단어는 의미를 가지게 마련인데 그것들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러’나 ‘가처’는 두 음절을 붙여놓은 것일 뿐 결코 하나의 단어가 될 수 없었다. 그 글자들은 내게 어딘가 모르게 인간을 연상시킨다. 자기 머리로 사고하지 않는, 유전자가 자기 목적에 따라 만들어낸 오류투성이 인간.     

요조는 자신이 부끄러움 많은 삶을 살았다고,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식 다테마에(겉으로 하는 말, 속마음과는 다른 말)에 불과하다. 조금 도발적으로 말하면 부끄러움이니 인간으로서 실격이니 하는 표현은 반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인간들에게 분노한다. 인간으로서 실격인 것은 너희들이다’라고 말하면 대다수 인간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기 때문에 평생 가면을 써온 것처럼 ‘내 탓이오’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조의 진짜 속마음은 ‘너희들이 보기에 나는 인간으로서 실격이지만, 그리고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음으로써 너희는 그 사실을 분명히 했지만 인간으로서 실격인 건 너희들이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쓰면 다른 인간들에게 분노를 사게 될 테니 겸양을 가장해서 ‘나란 아무래도 인간으로서는 실격인가 봅니다’ 하고 꼬리를 내린 척하는 것이다. 집단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특히 일본처럼 전체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나라라면.      


옛날 일본의 촌락에는 ‘무라하치부’라는 일종의 이지메 풍습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단결해서 특정인과의 교류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토지는 공동소유인데 경작도 할 수 없게 되고 우물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뒷산에 올라가서 거름이나 퇴비를 줍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립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빈약하고 지능이 낮은 사람들일수록 무리를 이루게 되면 남을 물어뜯는 걸 즐기는 경향이 있다.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이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남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은 집단 안에 속해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 이 무서운 집단의 힘에 대한 공포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지 요조는 끊임없이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었고, 인간으로서의 내 언동에 눈곱만치도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나의 고뇌는 가슴 속 작은 상자에 간직해두고 그 우울과 긴장은 극구 숨긴 채 마냥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척하며 나는 점점 광대 같은 괴짜가 되어갔습니다.

뭐든 좋으니 웃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내가 그들의 ‘생활’ 밖에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 눈에 거슬리면 안 된다.’     


익살을 부리기 위해 체육 시간에 멀리뛰기를 하다가 일부러 엉덩방아를 찧은 날, 다케이치라는 같은 반 친구는 요조에게 가짜라고 말한다. 다케이치는 ‘반에서 가장 빈약한 체격에 공부는 하나도 못하고 교련이나 체육 시간에는 견학만 하는 백치 같은 학생’이었다. 요조는 의외의 인물에게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제는 그의 죽음을 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죽일 마음만큼은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살해당하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상대에게 오히려 행복을 주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조는 다케이치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에게 친한 척을 한다. 그러던 와중에 다케이치는 어느 화가가 그렸다는 도깨비 그림을 보여준다.      


‘인간을 너무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무서운 요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어 하는 심리, 신경질적이고 겁을 잘 먹는 사람일수록 더 세찬 폭풍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받고 위협당한 끝에 결국 환영을 믿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광대 짓 같은 것으로 얼버무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다케이치의 말대로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장래 나의 동료가 있구나.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해서,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즉, 타인의 생각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는, 화법의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배운 나는 그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조차도 흠칫했을 만큼 어둡고 끔찍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감추어둔 내 정체다, 겉으로는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웃기지만 사실 나는 이런 음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다, 하고 나는 가만히 인정했습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해야 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를 솔직하게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들에게 깊이 감명받은 요조는 자신도 언젠가 화가가 되어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그 뒤 요조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도쿄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도저히 단체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청춘의 감격이니, 젊은이의 긍지니 하는 말은 듣기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아서 도무지 고교생의 기백이란 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울하고 생각이 깊은 요조가 청춘의 감격이니 젊은이의 기백이니 하는 단순하고 집단주의적인 슬로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그는 학교생활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어떤 화가의 교습소에서 데생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호리키 마사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호리키 마사오라고 하는 그 미술 학도는 도쿄 변두리에서 태어났고, 여섯 살 연상으로 사립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집에 아틀리에가 없어서 이 화방에 다니며 서양화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 엔만 빌려주지 않을래?”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일 뿐, 그때까지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오 엔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도시의 건달을 본 것입니다. 그는 나와 형태는 달라도 보통 사람의 삶에서 동떨어져 방황하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확실히 같은 부류였습니다.'   


'그냥 노는 것뿐이다. 놀이 상대로 어울리는 것뿐이다 하고 늘 그를 경멸하고 때로는 그와 어울리는 것을 부끄럽게까지 생각했으면서도 같이 다니는 사이에 결국 나는 이 남자에게마저 보기 좋게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남자를 호인, 보기 드문 호인이라고만 믿고, 인간 공포증이 있는 나도 완전히 방심해서 도쿄에서 좋은 안내자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리키는 또 모더니티를 추구한다는 거 허세로(호리키라면 그것 말고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나를 공산주의 독서회인가 하는(R.S.라고 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밀 연구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뻔한 소리였습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것이 있다, 욕심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허영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색色과 욕慾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아도 부족한 것. 나도 잘 모르지만 인간 세상의 밑바닥에는 경제만이 아니라 괴담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괴담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남을 짓밟고 고통 주고 이용하고 배척하는 마음, 그리고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의 너무도 무거운 삶의 무게, 그런 것들이 괴담에 맞먹을 만큼 끔찍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조는 ‘1 더하기 1은 2라는 식의 거의 초등학교 산수 같은 이론 연구에 빠져 있는 것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람들은 나도 자기들처럼 단순하고 낙천적인 익살꾼 ‘동지’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인 것입니다. 나는 동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에 꼬박꼬박 출석해서 모두에게 광대 서비스를 했습니다.‘   

  

‘비합법. 나는 그것이 은근히 즐거웠습니다. 마음이 편했습니다. 세상의 합법이 오히려 무섭고(거기에는 정체 모를 강함이 느껴집니다)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없어서,’     


‘음지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악덕한 자를 가리키는 말 같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음지인이었다고 생각해서 세상에서 음지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다정해졌습니다 나의 그 ‘다정함’은 내가 반할 정도의 다정함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다방에서 청승 맞은 여자 종업원 쓰네코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말로는 “외로워”라고 하지 않았지만 무언으로 풍기는 심한 외로움이 몸 바깥쪽에 한 치 폭의 기류처럼 떠돌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면 내가 가진 약간은 까칠까칠하고 음울한 기류와 적당히 뒤섞여 ‘물속 바위에 내려앉은 낙엽’처럼 내 몸은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백치 매춘부들의 품속에서 안심하고 푹 자는 느낌과는 또 다르게(무엇보다 그 매춘부들은 명랑했습니다) 사기꾼의 아내와 보낸 하룻밤은 내게 행복을 준(이렇게 거창한 말을 아무런 주저 없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이 수기에서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해방된 밤이었습니다.'     


요조는 모처럼 자기처럼 진정으로 우울한 사람을 만나 잠시 동지의식을 느낀다. 쓰네코는 여러 가지 불행한 사연을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겁쟁이는 행복을 누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도 다치는 일이 있습니다. 상처 입기 전에 빨리 이대로 헤어져야겠다는 초조함에 광대 짓으로 연막을 쳤습니다.’     


어느 날 호리키는 오늘은 여자와 키스를 하고 싶다고 요조에게 말한다. 두 사람은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쓰네코가 있는 다방으로 간다. 쓰네코에게 키스하려던 호리키는 “아무리 나라도 이런 궁상맞은 여자하고는......” 이라며 키스를 거부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하염없이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쓰네코와 얼굴을 마주 보며 슬프게 미소 지었습니다.’     


그 날 요조와가 쓰네코에게 느낀 감정은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처럼 주변인이며 음지인인 쓰네코에 대한 동질감.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버려진 것 같은 동질감. 이런 세상에서도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핍박받는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 친밀감이 가슴에 끓어올라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새벽녘에 여자의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죽고 요조 혼자 살아남았다. 요조의 부모님은 고향 사람인 넙치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에게 돈을 주며 그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 뒤 요조는 넙치의 집에서 살게 된다.     


‘넙치의 말투에는, 아니, 세상 사람들의 말투에는 이렇게 까다롭고 모호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무익해 보이는 엄중한 경계와 무수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자잘한 밀고 당기기에 나는 언제나 당혹스러워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광대 짓으로 얼버무리거나 무언의 수긍으로 다 맡기는 이른바 패배자의 태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넙치가 내게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해주었으면 그걸로 끝났을 일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넙치의 불필요한 경계심, 아니, 세상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허세와 빈말에 참으로 암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아무튼 4월부터 어디든 학교에 들어가세요. 생활비는 학교만 들어가면 고향에서 좀 더 넉넉히 보내주기로 했으니까요.’ 


원래 부모님이 넙치에게 부탁했던 말은 그것이었으나 넙치는 그 돈을 고향에서 대는 게 아니라 자기가 대는 것처럼 미묘하게 뉘앙스를 바꿔 말한다. 앞으로는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자못 엄숙하게 묻는 넙치에게 요조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넙치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굴욕을 맛본 요조는 결국 부모님이 자신을 지원해주기로 한 사실조차 듣지 못하고 그저 기분전환이나 할까 해서 호리키를 찾아간다.     


‘호리키는 그날 도시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일면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얌체 기질이었습니다. 촌놈인 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로 차갑고 교활한 에고이즘이었습니다. 나처럼 그저 한없이 물러터진 사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은 자신이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요즘 너무 바빠'라고 말한다.

“볼일이 뭔데?”

“야, 야, 방석 실 뜯지 마.”

나는 얘기를 하면서 내가 깔고 앉은 방석 신인지 매듭인지, 그 솔방울 같은 네 귀퉁이에 달린 실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리다 휙 뽑고 있었습닏. 호리키는 자기네 집 물건이라면 방석 실 한 가닥도 아까운지, 민망한 기색도 없이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나무랐습니다. 생각해보니 호리키는 지금까지 나와 다니며 무엇 하나 잃은 게 없었습니다.’     


‘호리키로 인해 나는 도시 사람의 알뜰한 본성, 또 안과 밖을 확실하게 구별해서 사는 도쿄 사람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안도 밖도 별 차이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생활에서 도망치고만 있는 얼간이인 나 혼자만 완전히 뒤떨어져서 호리키에게조차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당황했고, 칠 벗겨진 젓가락으로 단팥죽을 먹으면서 한없이 처량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기록해두고 싶을 뿐입니다.’     


호리키는 더 이상 요조를 물주로 이용해먹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뻔뻔할 정도로 돌변한 모습을 보인다.     

요조는 사람들의 피상성 못지 않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에서도 공포심을 느낀다. 사람들은 언제나 본심을 숨기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남을 기만하고 이용한다.  이러한 면모는 일본 특유의 완곡어법,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문화를 통해 일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뿐 아니라 지금 같은 시대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면을 쓰고 남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하든 사람들의 숨은 의도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런 불신사회에서도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요조는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속이면서 신기하게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 속이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 사례가 인간의 생활에 가득해 보입니다.’  

   

‘나에게는 서로 속이면서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 난해했습니다. 끝내 아무도 내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며 필사적인 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나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무서운 동물의 본성을 봅니다. 평소에는 그 본성을 감추는 듯하지만 어떤 계기로, 이를 테면 소가 풀밭에서 느긋한 자세로 누워 있다가 별안간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찰싹하고 때려죽이는 것처럼 갑자기 인간이 무서운 정체를 분노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머리칼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끼쳤습니다.’     


‘인간에게 호소하는 수단에는 조금의 기대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호소해도, 어머니에게 호소해도, 순경에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흔히 통하는 변명이나 들을 뿐이지 않을까요.’     


나 역시도 보호색을 하고 있는 동물들처럼 이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의 약삭빠른 처세를 볼 때마다 여기까지가 인간의 바닥이었지 싶다가도 그 밑에는 또 다른 바닥이 있고 또다시 더 깊은 바닥이 있는, 배신에 배신이 꼬리를 무는 무간지옥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바보인 척하는 내 가면은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래봤자 나는 아직 어리숙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완전한 고립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진정한 방어는 공격인데 나는 먼저 공격하는 걸 두려워했다. 피구로 치면 겁이 많아서 날아오는 공은 잘 피해도 그 공을 던져서 상대방을 죽이지는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게임에서 지고 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나는 피구 경기 때마다 거의 항상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공격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 팀은 늘 질 수밖에 없었고 나는 영원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조는 호리키 집으로 원고를 찾으러 온 어떤 편집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여자 집에서 잠시 기둥서방처럼 눌러앉아 살면서 만화를 연재한다.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언제나 술에 절어 있었지만 어느 정도 수입이 생기자 호리키가 다시 찾아와 오 엔(언제나 오 엔이다)을 빌려 가기 시작한다.     


이후 그 여자의 집을 나와 어린 소녀와 살림을 차려보기도 하지만 이 생활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넙치가 호리키를 데리고 요조를 찾아왔다. 그들은 어쩐 일인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신이 약할 대로 약해진 요조는 그 다정한 미소에 위안을 받는다. 두 사람은 각혈하는 요조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폐를 치료해주겠다는 처음의 약속과는 다르게 정신병원에 감금시켜버렸다. 이 일로 요조는 사람들이 자기를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낙인찍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은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머리에 어떤 다방 마담이 이 원고를 전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담은 소설가에게 십 년 전쯤 교바시 가게 앞으로 이 노트와 사진이 도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이 요조라는 사람의 원고를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설정이다.     


사실 이 부분이 상당히 의심스러운데 다자이 오사무는 다수의 작품에서 표절을 해왔고 그것은 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나 원고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내용 자체는 작가 자신의 삶의 이력과 어느 정도 일치하나 자신의 이야기에 어떤 문학청년의 노트를 섞어 집필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리 그럴듯한 글이라도 언어는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람의 행동을 봐야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마침내 이 생을 탈출한 걸 보면 다자이 오사무의 고뇌 그 자체에는 어느 정도 진실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자살 시도를 통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이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영민하고 세상의 위선과 허위를 견딜 수 없었던 인간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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