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그 장미가 맞습니다
“장..뭐라고요?”
배와 가슴께에 붉은 반점이 작게 생긴 것이 열흘 전이었다. 그러다 가슴 전체와 옆구리까지 간지럼증이 번졌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긴 했지만 아직 날은 더웠고, 매일 착용하고 나가는 브라 때문에 간지러운 거라고만 생각했다. 여름에 땀을 흘려 브라와 맞닿는 살갗이 가려운 건 매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간지러운 부분에 붉은 반점이 돋고 그게 배와 허리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순식간에 몸통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였을 때, 이게 단순한 땀띠가 아니란 걸 알았다.
처음엔 그냥 좀 참아보려고 했다. 원래 한포진 비슷한 아토피 증세가 자주 손을 뒤덮었고, 여름이면 땀띠, 그 외의 계절엔 건조함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피부질환은 일상이었다. 물론 현재의 상태는 평소 겪었던 아토피 증세와는 확연히 달랐지만, 이번엔 그다지 가렵지도 않았다. 두어 번 긁으면 아파서 더 긁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조금 큰 반점은 꼭 버짐이 핀 것처럼 허옇게 각질이 일어나 탈락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땀띠가 아니라 환절기 건조증인가 싶었다.
아빠는 수지침을 맞아보라고 했다. 아빠가 아토피에 좋은 혈점을 카톡으로 보내줬는데, 집에 침 도구 같은 게 있진 않으니 그냥 지압만 되도록 니들스티커를 붙였다. 엄마가 사다준 외제 마유크림도 꾸준히 발랐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조금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사흘 째 되는 날 몸을 확인하니 반점이 어깻죽지까지 번져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밤이었고 다음 날은 금요일이어서, 자고 일어나면 바로 병원에 갈 결심을 했다. 동네 용하다는 피부과가 어딘지 맘카페를 검색해보고 나서 잤다. 맘카페가 각종 폐해를 안고 있다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모르는 지방에 와서 지낼 땐 맘카페 만한 정보통이 또 없다.
아침에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고 옷을 걷어올려 거울을 봤더니 간밤보다는 발진이 좀 덜한 것 같아 보였다. 애초에 피부질환이란 게 다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질병에 따른 증상이 아니고서야 면역력 저하, 스트레스, 다 그런 것 때문이지 않은가? 피부과 가봤자 스테로이드 연고나 처방해주고 어쩌면 독한 알약도 처방해주겠지. 피부과에 가봤자 결국 별다른 원인도 뾰족한 해결책도 알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미적거리다 오전에 병원을 안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선 다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명이라도 진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특별한 처방이 없더라도 뭐라 하는지 들어나보지, 뭐 이런 심정이었다.
후다닥 밥을 먹고 병원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병원에 갔다.
강릉의 병원들은 예약이 안 되는 게 특징이다. 인기 있는 소아과 같은 곳은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라, 병원 진료시작 한 시간 전부터 가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최소 한 시간은 기다릴 생각을 하고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기다린 건 십 분 정도 밖에 안 됐다.
의사는 셔츠를 걷어올린 내 상체를 보고선 ‘장미색비강진’이라고 했다.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때는 ‘아이고 대장이 안 좋으면 피부가 안 좋다더니 장이 뭔가 안 좋은가 보구나 게다가 비강이 뭐 어쨌다고? 내과를 가야하나?’ 싶었다. 그저 심각한 병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달리 의사는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였다. 아무래도 내가 걸린 장미 어쩌구 하는 병은 별 볼 일 없는 질환인 모양이었다. 병명을 제대로 못 들어서 다시 물었더니 진료실에 같이 따라 들어갔던 간호사가 나가서 자세하게 병명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의사는 아무래도 대꾸 한 번 하는 것조차 귀찮은 모양이었다.
의사는 이 병은 특별한 이유 없이 걸렸다가 2개월 정도 있으면 저절로 가라앉는, 그런 병이라고 했다. 길면 3, 4개월 정도 가는데 저절로 낫고요, 샤워하고 난 다음에는 더 붉어보일 수 있어요. 환절기 등에 자주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저, 혹시 면역력이나 그런 게 떨어져서 그런가요?
뭐, 그렇지는 않고요.
의사는 점심식사 후 졸린지 더 말을 않았다. 웬일로 피부질환 단골멘트인 ‘면역력’을 함구하나 싶었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왠지 뭘 물어도 아니라고 할 것만 같아 그냥 입을 닫았다. 집에 가서 인터넷이나 검색해보기로 했다.
먹는 약은 처방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먹을 생각도 없었다. 처방전엔 ‘데소나 로션 0.05%(데소나이드)’가 적혔다. 간호사는 병명이 적힌 종이조각을 줬다. 엑셀에라도 붙여넣어 한꺼번에 프린트해 자른 것 같은, 그런 작은 종이조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준비돼 있는 걸 보면 흔한 질병인 것 같았다.
병원 아래층 약국에 가는 길에 당장 아이폰을 들어 ‘장미색비강진’을 검색했다. 이 질환은 장(腸)과도 비강(鼻腔)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장미색’은 薔薇色, 즉 장미색깔이라는 뜻이었다. 비강진(粃糠疹)은 각질이 비늘처럼 얇게 벗겨진다는 뜻. 그 흔한 비듬도 정식 명칭은 ‘두부 비강진’이란다. 뭐 아무튼 쓸데없이 로맨틱하면서(?) 좀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찜찜한 이름이다.
그렇게 장미색비강진과 함께 하는 나날이 시작됐다.
결코 로맨틱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