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소한 도쿄일기 5.

다섯째날, 에노시마-카마쿠라

by 릴리리

2017년 12월 6일 수요일 맑음.


에노시마를 가자.


그것은 P양의 제안이었다.
도쿄에 가도 언제나 그 안에서만 돌아다니기 바빴던 나는 도쿄 근교로 나가는 것이 처음이었다. 역에서 카마쿠라 패스를 끊었다. 하루짜리 카마쿠라 패스를 끊으면 종일 추가 요금 없이 카마쿠라 내에서 전철을 이용할 수 있다. 신주쿠 역에서 에노덴을 탔다. 신주쿠 역은 플랫폼 수가 많아서 언제 가도 헷갈리는 곳이다.
곧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12월 초의 에노덴은 귀여웠다. 카마쿠라 행이라는 행선지 양쪽으로 크리스마스 트리와 리스가 번갈아가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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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은 생각보다도 아주 많이 흔들렸다. 카마쿠라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가는 동안 잤다. 나는 버스든 비행기든 뭐든 타기만 하면 잘 잔다. 그것도 멀미의 일종이라는데, 아무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시간에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에노시마 역에서 내렸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역 앞엔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에노덴을 마스코트로 한 상품들이 많았다. 에노덴 기차 모양 장난감, 틴케이스에 든 과자, 볼펜 같은 문구류까지 웬만한 기념품은 다 갖추고 있었다. 뭐든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일본에는 정말 두손두발 다 들었다.

IMG_5846.JPG 에노시마 역. 바로 철길을 건너게 되어 있는 아주 작은 역이다.
IMG_5849.JPG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역 안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IMG_5854.JPG 역 앞의 새 모형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새 옷을 입고 있었다.
IMG_5850.JPG 에노덴으로 만든 각종 굿즈들

일본은 지역 특산물이나 관광지, 이벤트 등을 소개하는 그 지역만의 캐릭터가 많은데 이를 가리켜 ‘유루캬라’라고 한다. ‘느긋하다’는 뜻의 일본어 ‘유루이’와 ‘캐릭터’의 합성어로, ‘느긋한 캐릭터’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 기업에서 ‘팔아보자’ 하며 힘을 잔뜩 주고 만든 캐릭터와는 다른 여유가 넘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캐릭터 산업이 발달한 일본답게 유루캬라 그랑프리도 열린다. 개중에는 쿠마모토 현의 ‘쿠마몬’처럼 큰 인기를 끈 캐릭터도 있지만 굉장히 단순하고 일차원적으로 디자인 돼 지역 내에서도 잘 팔리지 않는 유루캬라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일본 내에 4천 여개의 유루캬라가 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인기를 얻는 것은 소수지만 대부분은 지방에서 조용히 명맥을 유지한다. 조용한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야망이 없는 삼십대인 것인지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위안인지 모를 일이다.

IMG_5851.JPG 평화로운 카마쿠라 거리

에노시마는 카마쿠라에 있는 작은 섬이다. 다리가 놓여 있어 차로 가거나, 걸어서도 갈 수 있다. 에노시마 여행을 수요일로 잡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주말과 떨어져 있으니 관광객이 적을 것이며, 따라서 한가롭게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 결과적으로 날씨가 매우 좋아서 다행이었다.

에노시마 역에서 조금 걸어야 다리가 나온다. 날도 좋고 사람도 없어 여유를 잔뜩 만끽하며 걸었다. 에노시마 명물인 타코센베이를 파는 가게가 있어 하나 사먹었다. 문어를 반죽과 함께 기계에 납작하게 눌러 얇고 바삭하고 커다란 과자로 만들어내는데 짭짤하니 맛이 좋았다. 꼭 얄팍하고 문어 맛이 강한 자갈치를 먹는 느낌이었다. 맛있는 걸 먹으니 남편 생각이 절로 났다. 딱 남편이 좋아할 맛이었다. 그래서 돌아갈 때 한 박스 사서 갔다. 에노시마 정상에도 팔지만 거긴 줄을 서므로 역 근처의 가게에서 사는 걸 추천한다. 어차피 같은 가게다.

IMG_5871.JPG 진짜 문어를 눌러 만든 타코센베이.

커피집엘 갔다. 빈야커피점이라는 가게였다. 1950년부터 문을 열었다는데, 일본의 오래된 커피숍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곳이었다. 흰 셔츠에 검은 베스트 차림의 점원들, 직접 와서 받는 주문, 다양한 디자인의 빈티지한 커피잔들, 나무가 주를 이루는 인테리어. 커피와 홍차와 함께 시루코도 먹었다. 네모난 구운 떡이 들어간 일본의 팥죽이다. 사실 팥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떡은 좋아한다. 이럴 경우 이기는 건 좀 더 주장이 강한 쪽이다. 떡을 좋아하는 마음이 팥을 싫어하는 마음보다 컸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다.

IMG_5861.JPG 고풍스런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던 빈야커피점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회색 모래가 깔린 해변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리의 가운데 즈음엔 공사 현장도 있었다. 빨갛고 노란 원색이 거친 건축 자재와 중장비와 혼재된 그 모습을 좋아한다. 멀리서 공사 현장을 카메라로 찍었다. 때마침 갈매기가 날았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좋았다.

000019.JPG 작업복과 위험 표지의 배색을 좋아한다.
000015.JPG 민트색이 인상적이었던 중장비
000029.JPG 제방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
000016.JPG 자전거 위로 갈매기

에노시마는 작아서 갈 곳이 많지 않다.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와 신사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온갖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식당들을 만날 수 있다. 아주 레트로한 물건을 100엔, 300엔에 파는 가게가 있어 이곳에서 퍼즐 컵받침과 손수건을 샀다.

IMG_5946.JPG 가게에서 팔던 그릇.

에노시마는 시라스동이 유명하다. 시라스는 꼭 잔멸치 같은 치어로, 이 아이들을 생으로 밥 위에 올려먹는 메뉴. 튀겨서 올리기도 하는데 생으로 올라가는 게 명물이다. 가장 유명한 가게는 텐카이. 신사로 올라가는 길에 있어 절대 놓칠 수 없다. 관광지에 흔한 식당 분위기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인 데다 수요일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한산했다. 주문한 것은 이쿠라시라스동. 연어알을 절여 빨간 빛이 예쁜 이쿠라는 스무 살 때 갔던 홋카이도에서 처음 먹어봤는데, 당시엔 그냥 짜기만 하고 뭐가 맛있는지 알지 못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이쿠라의 맛을 알고 나선 초밥집에 가서 늘 이쿠라를 찾는다. 우니는 배신할 때도 있지만(제철이 아닐 때, 싼 가게일 때) 이쿠라는 비교적 싼 가게에서도 일정한 맛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IMG_5888.JPG 시라스는 특별히 비리지도 향이 강하지도 않은 무난한 맛이었다.

계산대 앞에는 소라껍데기로 만든 초를 하나씩 가져갈 수 있도록 비치해놓고 있었다. 소라살을 발라낸 자리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의 예쁜 초가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엔 빨간색을 골랐다 내려놓고 노란색을 골랐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색은 빨간색인줄 알았다. 그런 믿음이 산산이 부서진 일이 있었다. 스물다섯 정도 되었을까, 혼자 백화점에 갔을 때였다. 아주 샛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점원이 ‘노란색을 좋아하시나봐요’라고 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일 같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노란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노란색은 언제나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색깔이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떤 색깔을 골라야하는 상황에서 늘 노란색을 고르고 있었다. 빨간색이 의식적으로 고른 색이었다면 노란색은 무의식이 고른 색이었다. 내 자아가 노란색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의식적으로도 노란색으로 고르게 됐고,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노란색’이라고 답변하게 됐다.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IMG_5897.JPG 에노시마 신사 입구

배를 채우고 천천히 걸어 신사로 올라갔다. 빨간 도리이를 지나 신사 입구 계단 위에서 뒤를 돌아보면 카마쿠라 해변의 높다란 건물과 바다가 보인다. 손 씻는 곳에서 손을 씻었다. 겨울이라 손이 시렸다.

IMG_5906.JPG 손 시려워하고 있는 P양

신사에선 다양한 기원을 담은 부적을 팔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P양은 예술운과 관련된 부적을 샀다. 몰랐는데 이곳은 애초에 예술과 기예로 유명한 곳이었다. 에노시마 신사는 세 자매를 모시는데, 첫째는 바다의 평안을 담당하고, 둘째는 재물과 예술, 기예, 셋째는 섬의 입구를 지킨다고. 봉안전에는 벤자이텐이 모셔져 있다. 음악, 변설, 재부, 지혜, 연수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에도시대 경부터 벤자이텐 신앙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예술운이라니 조금 혹했지만 엄마 뱃속에서부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나는 그냥 구경만 하고 말았다.

IMG_5921.JPG '머리가 벗겨지지 않도록 해주세요'라는 문장이 슬펐다. 그의 머리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신사 내 은행나무는 연애운으로도 유명해서 사랑에 대한 소망을 적은 핑크색 나무판자가 두서없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IMG_5912.JPG 그녀는 연상의 멋진 남자를 만났을까?

에노시마 정상에 올랐다. 전망대도 있고 정원도 있었는데 입장료가 있어서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전경은 광장에서도 다 보였다. 정상에선 사가미 만이 내려다 보였다. 햇볕에 반짝이는 바닷물의 결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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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10.JPG 그들은 망원경으로 아무 것도 없는 바다 위의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에노시마를 내려와 다시 다리를 건너 에노덴을 타고 카마쿠라로 들어갔다. 가려던 가게가 있었는데 문을 닫아 못 갔다. 가다가 마주친 공원에서 어린이용 놀이기구를 타고 놀았다. 나만 신났고 P양은 재미없어 했다.

IMG_5953.JPG 채소가게에서 귀여운 무와 순무도 만났다.

카마쿠라는 쇼난 지방으로, 내겐 왠지 폭주족이나 불량한 고등학생이 많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이것은 만화 <상남 2인조>의 영향이다. 실제 과거 쇼난 지역은 서핑과 오토바이 등으로 젊은이들이 들끓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인 70년대의 일이고, 지금은 그냥 조용한 바닷가 동네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관광객의 눈에는 말이다.

IMG_5996.JPG 한적하고 정돈된 카마쿠라 거리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카마쿠라 고교 앞을 꼭 간다지만 어린 시절 만화를 열심히 본 것 치고는 슬램덩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어렸을 때도 우락부락한 근육질 남성들에게는 매력을 못 느꼈었나 보다.


카마쿠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배경지로도 유명하다. 사실 미리 영화를 보고 가려고 했는데 결국 보지 못하고 갔다가, 거의 11개월이 지나서야 영화를 봤다. 잔잔하고 애틋한 구석이 있는 가족영화였다. 남성 감독이 그린 여성 캐릭터의 심리가 섬세해서 신기할 때가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그랬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특히 그렇다.

IMG_5997.JPG 땅콩을 과자로 감싼 것. 오징어땅콩의 고급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다양한 맛이 있고 시식을 할 수 있는데 맛있어서 3종류나 샀다.
IMG_5998.JPG 피곤해보였던 곰
IMG_6004.JPG 내 이름이 적혀 있어서 찍어봤다.

에노덴 창문을 통해 수평선 위로 어둑해지는 하늘을 봤다. 수평선 부근이 석양으로 발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하늘은 가운데서부터 어두워지는 것 같은데, 그 어둠은 어디서부터 밀려오는 걸까? 늘 지는 해만 보기 때문에 하늘의 가운데에 신경쓴 적이 없는 것 같다. 다음에는 해가 질 때 모두가 보는 붉은 노을이 아니라 어두운 쪽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IMG_6011.JPG 노을지는 하늘은 매일 봐도 아름답다.
IMG_6007.JPG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나는 역내.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는 내내 잤다. P양은 부지런하게 수첩에 갔다온 내용을 적었다. 나는 멀미가 나서 흔들리는 차 안에서 글자를 못 본다. 그 핑계로 잠만 잤다.

신주쿠에 도착하니 완전히 깜깜한 밤이었다. 배는 고픈데 피곤하고 멀리 갈 힘이 없어 제법 유명하다는 츠케멘 집에 갔다. 매운 맛으로 먹었다. 츠케멘은 면을 국물에 찍어먹는 라멘이다. 국물을 잘 휘감을 수 있도록 두툼하고 씹는 맛이 좋은 면발에 짭조름한 국물이 매력적. 절대 이 국물을 그대로 들이켜선 안된다. 너무 짜기 때문이다. 면을 찍어서 다 먹으면 ‘스프와리’를 부탁해 물을 더 부어 염도를 맞춘 다음 후루룩 먹는 게 츠케멘을 먹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론 스프와리를 부탁할 때도 있지만 아무튼 짜서 다 먹지는 않는 편이다. 맛있게 잘 먹었다.

집에 들어가서 잤다.


IMG_6014.JPG 신주쿠 야스베에의 츠케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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