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르릉쿵쿵.
블라인드가 드리운 창 너머로 우렁찬 천둥소리가 들렸다. 나는 피부과 침대에 누워 관리사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밖에 비와요?
아직 안 오는데, 올 거 같긴 해요.
집에서 나올 때는 분명 날이 쾌청했기에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걱정인 것은 당장 내일 있을 결혼식이었다. 장소가 야외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스몰웨딩이나 셀프웨딩이 흔하지만 그 때만 해도 웨딩 플래너를 끼고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주변에는 결혼한 친구도 형제도 없었기에 모든 걸 알아서 결정해야 했다. 결혼식인데 웨딩 앨범 정도는 당연히 있어야겠고, 결혼식에 드레스를 입지 않을 수는 없고, 메이크업을 혼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 모든 걸 혼자서 직접 계약하는 것보다 웨딩 업체를 통하는 게 훨씬 쌌다. 서비스도 줬다. 일명 ‘스드메’,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웨딩 업체 몇 군데를 들렀다. 예산을 말하면 그에 맞는 ‘급’의 스드메 업체들을 몇 개씩 보여주고 고르는 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케 꽃 종류까지 정해둔다지만 스물다섯의 나는 꽃에 대한 취향이 전혀 없었고, 결혼식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도 무지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이상적인 결혼식 풍경은 있었다. 나는 언제나 공상을 좋아했으니까, 그런 상상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커다란 빌딩 몇 층에 있는 결혼식장, 혹은 다이아몬드홀, 사파이어홀, 루비홀, 온갖 홀이 층층마다 있어 내가 누구 결혼식에 온 것인지도 헛갈리는 그런 결혼식장은 싫었다.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십오 분 만에 식을 끝내고 다음 결혼식을 위해 사진까지 번갯불에 콩 궈먹듯 해치우는 공장식 결혼도 싫었다. 그렇다고 성당에서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톨릭 신자는 우리 가족뿐인데, 한 시간 남짓한 혼인미사에 몸을 배배 꼬고 앉아있을 친구들과 기타 지인들을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신자인 나도 타인의 혼인미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하느님 죄송합니다) 축의금만 내고 밥을 먹으러 호다닥 도망가기가 일쑤였으니까.
내가 워하는 건 작은 하우스 웨딩이었다. 두 시간이건 세 시간이건, 다음 결혼식 커플 걱정 없이 피로연장의 하객들과 인사를 마음껏 나누고, 같은 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우리 결혼을 축하하러 와준 사람들이라는 걸 의심할 필요 없는 독립적인 공간이 멋진 그런 하우스 웨딩.
물론 ‘하우스 웨딩’은 콘셉트일 뿐, 정말로 집에서 결혼식을 할 수는 없었다. 하우스 웨딩을 해주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동안 지나다니며 유심히 봐뒀던 곳을 골랐다. 조용한 역삼동 주택가에 위치한 곳으로, 주택 건물을 개조해 파티 장소로 운영하고 있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선 예식을, 지하가 있는 2층짜리 건물에서는 피로연을 가질 수 있었다. 지하에도 햇빛이 드는 베란다가 딸려있어 밝은 분위기였고, 1층과 2층에는 너른 창문이 있어 밥을 먹으며 마당에서 열리는 예식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3백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해 부모님 손님도 충분히 여유 있게 오실 수 있는 크기였다. 그리고 결혼식은 하루에 두 번만 했다. 점심 타임, 저녁 타임 이렇게 딱 두 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밥을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식사도 마침 내가 좋아하는 갈비탕 정식이 준비돼 있었다. 내부를 둘러보고 바로 계약했다.
결혼식 날짜는 남편과 내가 직접 골랐다. 다행히도 양가 부모님은 점 같은 걸 믿지 않는 분들이셔서 길일이니 뭐니 그런 걸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5월, 한낮의 야외는 너무 더울 것 같았다. 3월은 또 아직 쌀쌀해서 콧물을 훌쩍일 것 같았다. 고른 건 4월 하순의 토요일이었다. 결혼식 후 일주일에 일요일, 또 바로 다가오는 어린이날까지 포함하자면 거의 열흘 정도를 신혼여행에 할애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하객들도 어린이날이 붙은 황금연휴엔 어디 놀러갈 궁리를 하지 남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었다. 우리는 결혼식 날짜를 정하고는 아주 흡족해했다.
한두 달 결혼 준비를 하다가도 깨지는 커플이 부지기수인데, 우리는 계약을 한 시점으로부터 실제 결혼식 날까지 열 달이나 남겨놓고 있었다. 그래도 신났다. 철이 없어서 그런지,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남편의 성격이 좋아서인지, 양가 부모님이 너그러우셔서 그런지(넷 다인 것 같다) 파혼 위기 같은 건 없었다.
결혼 준비하면서 싸운 적도 없었다. 예물도 간소하게 했다. 결혼반지는 심플한 걸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난 시계는 잘 안 차니까 저렴한 것도 괜찮아. 대신 샤넬 백 하나는 사줘. 그리고 남편은 좋은 시계를 샀다.
결혼을 열흘 앞두고 아이슬란드에 화산이 폭발했다. 이름도 어려운 에이야파틀라이외퀴틀 빙하 지대에서 폭발한 화산은 어마어마한 화산재를 분출해 유럽 전역의 공항에서 항공기 운항이 중지됐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은 우리 신혼여행지가 유럽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남부와 파리를 포함한 자유여행이었다. 매일 뉴스를 찾아보고 다급한 마음에 호텔과 항공권을 예약한 여행사에 문의도 해봤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이번 주 예약했던 고객님들은 다 못 가셨어요. 다음 주는 지켜봐야할 것 같아요…
출국 이틀 전까지 항공사에선 연락이 없었다. 여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출국일은 결혼식 다음 날, 일요일이었다. 결혼식날 갑자기 취소라고 연락이 오진 않겠지. 마지막까지 불안감은 가시길 않았다.
근데 복병이 하나 더 있었다. 날씨였다.
결혼식이 예정된 그 주는 내내 날씨가 좋지 못했다. 급기야 하루 전인 금요일엔 천둥번개까지 치며 비가 잔뜩 내렸다. 웨딩 플래너는 비가 오면 차양을 쳐줄 거라고 했지만 야외 웨딩을 계획하며 꿈꿨던 그림은 당연히 아니었다. 마지막 날까지 걱정 속에 잠이 들었다.
다행히 결혼식 당일엔 너무도 날씨가 좋았다. 새파란 하늘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소풍날도 이런 날씨는 못 본 것 같았다.
하객이 정말 무진장 많이 왔다. 부모님 손님만 많을 줄 알았는데, 결혼 전에 얼굴도 못 봤던 대학 동기들도 찾아와줬다. 그 때는 어리바리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고맙다.
결혼식장엔 차례대로 우리가 선곡한 곡이 울려퍼졌다. 신랑입장곡은 더 케미컬 브라더스의 ‘Saturate’, 신부 입장곡은 스웨이드의 ‘The Wild Ones’였다. 음악이 좀 더 크게 울려 퍼지면 좋을텐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결혼식 전에 웨딩플래너에게 물어봤지만, 주택가라서 음악을 너무 크게 틀수는 없단다. 아쉬웠다.
그 아쉬움은 퇴장곡에서 완전히 해소됐다. 퇴장곡으로 고른 노래는 트래비스의 ‘Closer’였는데, 음향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뭐였는지 온 마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가 났다. 버진로드의 끝에서 장미꽃잎이 흩날렸다. 친구들이 준비했던 장미꽃을 건네줬다. 모두가 박수를 쳤다. 프랜시스 힐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Closer, closer,
Lean on me now
Lean on me now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내게 기대어. 내게 기대어.
파란 하늘 아래 나풀거리는 장미꽃잎이 눈부셨다. 그 위로 2009년에 갔던 트래비스 내한공연의 한 장면이 겹쳐 보였다. ‘Closer’가 울려 퍼질 때 관객들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그 종이비행기는 오늘 여기서 꽃잎이 되어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완벽한 날이었다.
물론 세세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아쉬운 점이 너무도 많았다. 몇 달 간 결혼 준비를 도와줬던 웨딩플래너는 결혼식 당일 갑자기 못 온다며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대신 온 사람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원래 예식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결혼식 진행을 도와주는 직원도 거의 없어, 하객들은 역삼동 주택가를 헤매기도 했다. 사회를 맡아주기로 한 남편의 친구는 결혼식 시작 5분 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 때문인지 경험도 없는 주제에(?)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설쳐댄 탓인지 결혼식 진행도 영 매끄럽지 못했다.
전시용으로 배달되어 온 액자는 모서리 보호대를 떡하니 찬 상태로 손님을 맞이했으며, 남편과 함께 부르기 위해 준비한 노래는 화음이 맞지 않았다. 준비한 식사가 모자라 저녁에 있을 다른 결혼식을 위해 준비됐던 음식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나중에 식사를 한 사람들은 전복이 없는 갈비탕을 먹어야 했다(우리는 전복 갈비탕을 예약했고, 저녁에 결혼하는 커플은 그냥 갈비탕을 예약한 모양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전문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는 게 아니구나, 곱씹어보게 됐다.
그래도 폐백과 하객 맞이를 모두 끝내고 마당으로 내려갔을 때, 잔디밭 위 테이블에 한복을 입고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외가 식구들의 모습을 봤을 때 생각했다. 아, 여기서 하길 정말 잘했다.
토요일 결혼식을 마치고 다음 날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 에이야 어쩌구하는 화산재는 제법 걷힌 모양이었다.
비행기 안에 피곤한 몸을 누이며 남편과 나는 결혼식에서 아쉬웠던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 나는 같은 발이랑 같은 팔이랑 나갔어.
뭐?
신랑 입장 할 때. 왼발 왼팔 같이 나가고 있더라.
진짜? 나는 말이야…
대화 끝에 이른 결론은 하나였다.
다시 하면 무지 잘 할 거 같은데.
나도 그 생각했어.
근데 다시 할 일은 없지.
맞아. 해도 안 되고.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이제는 결혼식도 오래된 추억이 됐지만 여전한 생각이 있다. 다시 하면 정말 잘 할 자신이 있다고. 그러니까 20주년 즈음엔 리마인드 웨딩, 콜?
여담이지만 결혼식 후 1년 여 정도 지났을 때 학교 선배가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하나 올렸다. ‘너네 결혼은 무효다!’ 선배는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는 기사 하나를 링크해놨는데, 우리가 결혼했던 하우스 웨딩 장소가 일반음식점인가 뭔가로 등록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으로 사용해 사실상 불법 운영 중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 업체가 바뀌고 용도 변경을 잘 했는지 여전히 파티 장소로 운영되고 있나 본데, 더 이상 그 골목길을 지날 일이 없어진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 결혼은 무효가 아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냈으니까. 혼인신고서는 꼭 두 사람이 다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게 좀 충격이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법적으로도 부부이며, 훗날 꼭 리마인드 웨딩을 할 것이다. 그 때는 노래에 랩까지 준비할 테니까, 독자 여러분도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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