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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ug 10. 2023

눈물 젖은 감자칩

유학, 여행, 그리고 감자칩의 비애


언제부터 감자칩 한 봉지가, 로컬이라 읽고 싸구려라 마시는 맥주 한 캔이 끼니를 대신하기 시작했는지 알지 못한다.


희미한 밀 내음이 친구 녀석의 담배 연기에 바스라 흩어지던 코스타리카의 임페리얼 비어부터였나, 아니면 미국 공항에서 과자 두 봉이면 버거 하나라며 주워 들었던 Lays 감자칩부터였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런지 아니면 이제 너무도 무뎌져서 그런지 도무지 그 시작을 짚어낼 수 없다.


새우깡과 포스틱을 제외한 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마저도 야구장에서나 가끔 맥주와 곁들였던 나였기에, 고깃집에 가면 5인분에 밥 3 공기는 먹어줘야 배를 두드렸던 나였기에, 감자칩 한 봉지와 맥주 한 캔으로 갈음하고 마는 요즘의 저녁은 어색하고, 또 비참하다.


정확한 시점을 짚어낼 수는 없지만, 미국에 오기 전 할머니가 주셨던 돈, 내가 군대에서 18개월 동안 모았던 쥐꼬리만 한 돈, 그리고 주식으로 번 얼마 안 되는 돈에, 그간 몰래 쌓아놨던 비상금 주머니를 탈탈 털어봐도 땡전 한 푼 나올 구석이 없어짐에 따라, 개당 2달러 정도 하는 라면을 사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아졌다.


< 이탈리아 베니스, 이틀치 식량 >


부자도 라면은 먹는다는 말이 있다.


맛은 없지만 학교에서 꼬박꼬박 밥은 나왔으니 결국 라면은 대체제였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돈을 아끼기 위해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사 먹기 시작한 건 분명 감자칩이었고, 그 시작은 여전히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 싶은 건가.


결국 갈라파고스에서의 25달러 랍스터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의 12달러 포모도로 파스타로, 또 이탈리아에서 8유로의 마르게리타 피자 한 판으로, 그리고 이내 영국에서의 케밥, 그리고 키프로스에서의 감자칩 한 봉지로 격하된 것이라 그 과정만을 어림짐작할 뿐.


공깃밥 한 그릇이 1,000원, 동네 국밥 한 그릇이 8,000원인 나라에서 내 돈을 주고 감자칩을 사 먹는 일은 결코 없었고, 아침이면 밥상이 차려져 있어 일어나는 것만이 일이었던 한국에서의 생활과 유럽의 서쪽 끝에 다다른 여행자의 생활은 사뭇 달라 여전히 적응이 쉬이 되지 않는다.




바다 건너오기 전에는 절약하는 삶에 대한 낭만이 있었다.


심플 라이프였나 스몰 라이프였나. 절약하며 내가 진정으로 가치를 두는 것에 돈을 지출하는 삶,


그런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한 때 월 지출을 5만 원으로 제한하며, 절약하는 나 자신에게 쓰잘데 없는 자부심도 느꼈다.


그러나, 그 역시 여유에서 비롯된, 넉넉한 통장 잔고에서 비롯된 감정이었음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막상 돈이 떨어져 가자 마주한 현실은 사뭇 달랐다.



외로움, 언어장벽 등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문제들이라 막상 당연하다 생각하고 왔으니 사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돈은 달랐다.


장이라곤 보지 않으며 집에 기생하던 내가, 난생처음 마트로 나와 20원 30원 차이의 감자칩을 두고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떨어져 가는 통장 잔고를 볼 때의 불안


간단히 부모님에게 돈을 달라고 얘기하면 될 문제지만, 이미 학비로 연간 수천만 원이 빠져나가는 상황 속에 죄스러운 기분을 떨쳐낼 수 없어, 입이 잘 떨어지지 않고, 결국은 불안이 증가하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나 자신에게 절약을 강요한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고 했냐고 하면 할 말은 없고, 전적으로 내 문제지만, 아직 애 티를 못 벗은 무늬만 어른인 내게는 돈 문제가 너무도 크게 다가온다.)


< 맛은 있다. 먹을 땐 행복하다ㅎ >


아침에 일어나 더 저렴한 자두를 구매하기 위해 30분을 허비했다.


1kg 당 2.19유로 하는 슈퍼마켓과 1kg 당 2.39유로 하는 로컬마켓의 자두의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기 위해 소모한 시간.


막상 자두 몇 알을 사고 나니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1.35유로였나... 0.12유로. 결국 구매한 것은 2.39유로짜리 자두였고, 173원을 더 쓰기 위해 도합 30분을 낭비했다.


흔한 일이다.


미국에선 돈이 없으니 먹고 싶은 게 있더라도 참았고, 그나마 물가가 저렴한 유럽에선 한 끼는 식당에서, 나머지 한 끼는 1.69유로와 1.99유로짜리 감자칩 사이에서 고민하며 때웠다.


맛이 없다는 것도, 저렴한 게 싫다는 것도 아니다.


< 키프로스에서의 저녁. 현재까지 경험한 지중해 맥주는 쓰레기…배는 채워주나 한국 맥주보다 심하게 밍밍한데 쓴맛은 강렬하다. >


다만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적은 금액에 내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때면, 더없이 비참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불행하다는 건 또 아니다는 게 웃픈 걸까. 너무도 불행했으면 진작에 집어치웠겠지.


그저 의식주 중에 - '의'는 포기한 지 오래됐으니까 논외고 - '식'을 추가적으로 포기했을 뿐이다. '주'는 유학을 결심한 순간 없어졌으니까.


다른 유학생들 혹은 해외에서 생활하시는 분들 역시 비참해도 해외생활을 포기할 만큼 불행하지는 않기에, 말로 설명한들 100원의 소소한 차이에서 오는 그 설움을, 그 비참함을 녹여내 이야기한들 공감받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기에, 순간순간은 지나가기에, 그리고 결국은 떠나거나 상황이 나아지기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는, 감자칩의 비애.


이상과 현실의 간극.


< 맛 없다. 돈 주고 샀으니 무조건 다 먹는다. >


맥주 한 캔 살 돈도 아까워, 안전한지도 모르는 호스텔의 싱크에서 수돗물을 받아마시며, 한여름 갑작스레 내린 스콜에 눅눅해진 감자칩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혀를 내밀어 봉지 끝에 묻은 부스러기를 남김없이 닦아 먹었다


꾸역꾸역. 오늘도 내일도 가난한 내 젊은 날의 하루가 이렇게 또 지나간다.


- 추신. 그럼에도 맥주 한 캔은 망설임 없이 결제하는 내 모습에서 한국을 사랑하는 유학생의 모순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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