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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ug 10. 2023

독일과 69시간

독일인, 한국인, 그리고 효율

특이한 독일인들. MBTI로 치면 가장 J적인  민족.


이 민족은 입사 후 한 달 내로 1년 휴가 계획을 적어내는, 여행지에서의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는 효율의 민족이며, 이러한 부지런함에 힘입어, 전 세계 곳곳에서 가장 빈번하게 목격되는 민족이기도 하다.


실제로, 니카라과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가 독일인을 그만 보려 여행을 떠나도 결국 돌고 돌아 독일인을 만나게 된다고 할 정도이니.


정나미 없이 맥주 한 잔 휙 테이블에 던져 놓다가도, “오늘은 부어스트가 맛있으니 먹어보든가.” 라며 츤데레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신기한 민족.


< 맥주가 끝내준다. >


독일에 가면 맥주도 좋고, 맥주도 좋지만, 한 번 마트에 들러 직원의 물품 스캔 과정을 유심히 관찰해 볼 것을 권유한다. 꽤나 흥미로운 경험인데, 스캔할 때 물품을 들고 멈췄다 스캔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으로 한 바퀴 물품을 감아 돌리며 휘젓고 간다. 물론, 독일인답게 그 속도가 꽤나 빠르고 때론 경이롭다.


다만, 카드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 현금을 애용하기에, 계산대 통과는 빨리 해도, 막상 잔돈을 교환하면 시간은 비슷하게 걸린다는 게 모순적이다.


독일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안 그래도 현금 사용으로 인해 느린 계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축소시키기 위해 독자적인 스캔 방식을 개발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여하튼, 요악하자면, 내가 본 독일인은 일처리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민족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나라가 슬프게도, 바로, 한국이다.


< 5개국을 5일 만에 주파한 나 역시 뼛속까지 한국인인 건가 >


빨리빨리를 외치고,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인터넷 네트워크 속도를 국토 전역에서 누릴 수 있으며, 혹여 여행이라도 가면 4개국을 10일 만에 주파해 버리는 민족이 효율적이지 않다면 누가 효율적일까 싶지만, 적어도 노동생산성 측면에서는 사실이 그러하다.


지난 2020년,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산업의 노동생산성은 독일 대비 52.4%에 불과하다고 한다.


< 시간당 노동생산성, 출처: OECD >


2020년 기준 OECD 국가들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평균 58.9 달러.


아일랜드는 109.5 달러, 미국은 77.1 달러, 독일이 74.2 달러를 기록하며 각 1, 2, 3위를 차지.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41.5달러였다.


동일한 국가가 아닌데 비교하는 게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기엔, 독일과 한국은 상당히 유사한 산업 구조를 드러낸다.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재편한 여타 선진국과 달리 아직도 GDP의 30%가량이 제조업에 기반을 두며, 각자 기계와 반도체라는 확실한 강점과 세계를 선도하는 자동차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 한국이 꾸준히 최상위권을 유지 중인 항목도 있으니 바로 근로시간이다.


각국의 연차 유급 휴가 일수만 따져봐도 자명한데, 독일은 법적으로 30일의 휴가를 보장받으며, 반면, 한국은 그 절반인 15일을 명시적으로 보장받는다.


간단히 말해 효율도 반, 휴가도 반.




지난 3월, 정부에서 탄력 근로제를 도입해 주당 최대 69시간을 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취지는 이해한다. 아니 취지만 이해한다.


한국의 문제는 일단 세계를 이끌, 선도할 미래 먹거리 산업에서 후발주자라는 점(반도체는 예외지만, 미국/중국/유럽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돈을 퍼붓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 우위가 유지될지 모르겠다.)과 여타 선진국과 다르게 여전히 산업 구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에 기인한다. 출산율 저하로 인해 노동자가 부족해질 것이며, 이민에 대한 반감이 강력하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점입가경, 첩첩산중이고, 결과적으로 효율성을 증대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근무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다만 정말 취지대로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게 문제다.


현재의 시간 배분에서 비효율성을 제거하겠다는 명분은 그럴 듯 하지만, 은연중에 초과근무를 기대하는 못된 심보가 숨어있는 것 같다고 할까. 노동자 입장에선 조삼모사가 아닌 조이모삼 정도 되는 제도로 보인다.


<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정치인들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다.  >


결과의 기댓값은 효율 곱하기 시간이니 시간을 늘려버리겠다는 단순무식한 해결책.


단기적으로는 어떻게 먹혀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속 가능한 방향성은 결코 아닐 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찍어내는 공산품 앞에, 그리고 매년 5%, 10%씩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동남아시아 국가 및 인도가 공급하는 노동력 앞에, 한국은 이미 가격 측면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잃었고,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필요로 한다.


< 저커버그가 지난 2016년 공개한 옷장, 출처: 저커버그 개인 페이스북 >


메타(Meta)의 CEO인 마크 저커버그는 옷, 식단, 하루 일과 등 통일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해 생활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이 하루에 효과적으로 내릴 수 있는 의사결정이 많아봐야 서너 개임을 강조하며, 경영자로써 기업의 존망에 가장 중요한 결정에 최대한의 역량을 쏟아붓기 위해 이러한 생활을 고집한다고 한다.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도 이와 같다. 무식하게 시간을 투입해 결과가 나오기를, 모두가 착취당하는 구조에서 고생하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중요한 과업에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졸업 후 짧은 회사 생활을 하며 내가 느꼈던 점은 소소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업무 시간에 커피도 사러 가고,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을 사내 메신저로 주고받고, TV에 흘러나오는 뉴스도 잠깐잠깐 봐주는.


여행 다니며 만난 독일인들과 그리고 마찬가지로 최소 6주의 휴가를 보장받는 덴마크의 사촌 형으로부터 들은 회사 생활은 사뭇 달랐다.


< 덴마크에서 퇴근 후 가족이 모여 함께 누리는 저녁 시간 >


근무시간에 딴짓은 일절 안 하고 퇴근 종이 치면 바로 퇴근해 버리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고 한다. 더불어, 야근을 해야 할 일, 추가적으로 업무가 남아 있다면 그건 비효율적으로 일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건강한 근로문화가 확립되어 있다고 들었다.


전형적인 중소 규모의 제조업 기업에 종사하셨던 아버지의 일과를 생각해도 그렇다. 2000년 대 초반까지는 휴일 없이 매일같이 일을 하셨다 들었으며, 그래도 직급이 높으셔서 보통 8시에 출근하셔서 저녁 6~7시면 퇴근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한 아버지와 관련해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의문점은 도대체 야구를 같이 본 기억이 없는데, 모든 팀의 경기 결과를 나보다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가였고, 그 의문은 방학숙제로 아버지 회사의 공장을 견학하며 풀렸다. 관성이란 게 참 무서운 건지, 15분 동안 커피를 타 드시고 이후 앉아서 야구 하이라이트를 다 챙겨 보셨다. 담배는 끊으셨지만, 예전에 담배까지 피우셨다 생각하면 하루에 족히 1시간의 근로 시간이 아무것도 안 한 채 사라지는 것.


물론, 대학생인 내 사회 경험은 일천하다 못해 거의 없다시피 하며, 아버지가 다니셨던 중소기업의 사례로 과도한 일반화를 한다 비판할 수도 있으나,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고, 한국의 노동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엄연한 팩트다. (만일 그렇지 않다 생각하면, 미래가 밝은 기업, 혹은 부가가치가 높은 업종에서 근무하고 계신 것이기에 축하드리며, 그 또한 아니면 흠...)


< 친퀘 테레. 나는 태닝을 즐기며 다섯 마을을 다 둘러보지 않는 미국인 친구들을, 미국인 친구들은 그저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


미국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잘 사는 놈은 잘 살 수 있는 나라. 총 맞을 걱정이라고는 할 필요가 없도록 언덕 위에 펜스 두른 집을 짓고, 요트 한 대쯤은 장만한 상태로, 가끔 태닝을 위해 휴양지로 떠나는 삶.


대대손손 부자거나, 죽어라고 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청춘을 갈아 넣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삶. 


< 평일 저녁, 아우구스티너 켈러에서, 5,000석 규모임에도 만석이다... >


독일의 방향성 역시 명확하다.


아주 잘 살 수는 없지만, 모두가 적당히 잘 사는 나라. 일 년에 한두 번씩 중남미로 떠날 돈을 벌고, 살벌한 물가에도, 집을 사서 꾸미고, 퇴근 후 비어 가든에서 맥주 한 잔과 안주를 걸칠 수 있는 삶.


미국은 돈을 벌고, 독일은 시간을 번다. 그 시간으로 돈을 효율적으로 번다.


< 한국인만 있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줄을 서서 시간을 아껴가며 사진을 찍어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백미. 현지인은 보이지도 않는다.  >


그리고 한국의 방향성 또한 명확하다.


69시간을 일하는 것 외에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한, 토요일에 일하던, 착취의 나라.


많이도 참고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코로나 시대 이후 한국인 해외 관광객이 폭증한 것도 그간 억눌려 왔던 ‘쉼’에 대한 욕망의 표출 아닐까 싶다. (다만 관성이란 게 무서워, 깃발 아래 한국인은 여행도 전투적으로 다닌다.)


바꾼다, 바뀌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 문화는 여타 선진국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따라 하려다 이제 그마저도 역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간의 집중력은 분명 한계가 있고, 향후 미래 산업은, 미래 산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고부가 가치 업종은 그러한 인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쉬지 못하는 한국인은 쉬어도 쉬지 못하며, 일해도 일하고 있지 않다.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어찌 보면 고성장의 원동력이었던 무식한 근로 문화는 단시간에 바뀌기 어렵고, 69시간이라는 단어가 2023년에 버젓이 정치인들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아직도, 적어도 한국의 권력층이 아직도, 후진적인 노동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직원이 물품을 휙휙 돌려가며 스캔하는 독일에서 대형마트는 오후 9시면 문을 닫는다. 맥주 한 잔과 함께 하는 저녁,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독일인은 연간 최소 30일에 달하는 휴가를 즐기며, 1350시간을 근무한다.


반면 한국의 대형마트는 11시까지 영업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트레스를 풀려 1차에서 N차까지 소주와 함께 하는 밤, 그리고 여타 국가보다 일찍 찾아오는 아침까지. 한국인은 고작 2주 정도 되는 휴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1915시간을 근무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전투적인 깃발 여행 문화는 일에 치여 삶을 살아낼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쉬기 위해 창조해 낸 문화, 슬픈 현실의 산물이다.


노동 시간을 늘리면 효율이 떨어질 게 자명하고, 그렇다고 한들 효율을 증대시킬 마땅한 방도가 없다면, 발상을 바꿔, 그간 열심히 달려왔던 우리 모두에게 휴식을 먼저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어찌 됐든, 가끔, 아니 늘 잊고 살지만, 우리는 일하려 사는 게 아니라 행복하려 사는 거니까.




이러한 독일도 올해 역성장할 조짐을 보이는 등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잃어버렸다 평가받고 있다. 노동 인력 확보를 위한 무분별한 이민 정책을 펼치고 내연기관 사업에 집중했던 독일의 모습은 출산율 저하에 대한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으며 반도체 일변도의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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