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 Sep 03. 2023

라거의 정점, 그리고 인종차별

아우구스티너 켈러

뮌헨 맥주 기행의 첫 장은 아우구스티너 켈러(Augustiner-Keller)에서의 도합 2L 들이, 라거 헬레스(Helles)와 흑맥주 던켈(Dunkel)로 시작한다.


당초 계획은 1L 들이 마스(Mas) 글라스에 헬레스 한 잔을 비우고, 0.5L 들이 던켈로 식사를 마무리하는 것이었으나 직원이 실수로 헬레스를 0.5L 더 가져오는 바람에 0.5L를 더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돈은 더 냈지만, 아무렴 맥주를 마시러 온 입장에서는 의도치 않게 맥주가 추가되었다 한들 환영이기에 기꺼이 잔을 비웠다.




난 감히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기네스,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델리리움 녹터넘(Delirium Nocturnum, 밤의 섬망증이라니, 참으로 낭만적인 - 농도 짙은 흑맥주에 어울리는 - 이름이 아닌가.)과 더불어 독일 뮌헨의 아우구스티너를 내 인생의 3대 맥주로 꼽는다.


이탈리아 남부의 페로니(Peroni) 레몬 칠리는 술보다는 음료에 가깝고, 체코 프라하(Prague)의 코젤(Kozel)은 지역에 따른 품질의 일관성을 잃어버렸으며,


< 가장 편차가 심한 맥주, 코젤 >


시트러스 향이 강해 거북한 프랑스의 블랑(Blanc)과 강하다 못해 끝 맛에서 피의, 철분의, 비릿함이 감지되는 벨기에의 슈프(Chouffe),


특색 없는 주필러(Juplier), 코끼리 오줌을 먹는 듯한 네덜란드의 하이네켄(Heineken),


되지도 않는 라이트와 IPA라는 같잖은 편법으로 술꾼을 기만하는 각종 미국 맥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밍밍하기 그지없어 절대적으로 맛이 없는 한국 맥주까지.


작년 7월,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으로 지내온 동창 녀석과 서면에서 먹었던 스시에 곁들인 테라 한 잔은 곧 떠난다는 현실과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다짐이 녹아나 기이하리만치 달았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에서 투어 도중 최상층 바에서 따라주는 대로 마셨던 흑맥주 한 잔과,


가장 많은 종류의 맥주를 보유한 것으로 기네스에 등재돼 있으며, 불야성의 브뤼셀 시내, 밤의 골목을 지배하는 델리리움 바에서의 8.3도 벨지안 스트롱 다크 에일 한 잔,


그리고 치즈 부어스트와 곁들였던 아우구스티너-켈러에서의 상쾌한 라거 한 잔의 기억은 그보다 강렬해 나로 하여금 다시 뮌헨을 찾게 만들었다.


더블린의 공장에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에서, 영국에서, 또 유럽에서 멀어질수록 품질이 저하되는 (샌프란시코에서의 한 잔이 유일한 예외였다.) 기네스와


벨기에에서도 드문드문 눈에 띄는, 수입으로 구하려 노력해야 겨우 한 잔 마실 수는 있는 델리리움 녹터눔과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할 수 있는, 마실 수 있는, 맥주들과 달리,


아우구스티너는 캔으로 본 기억이 없어, 어찌 됐든, 기꺼이 맥주의 도시 뮌헨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비어가든으로 찾아가야만,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을 선사한다.


어정쩡한 커피 같다며 기네스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알코올이 뇌를 절이는 것 같다며 녹터넘을 혐오할 수도 있지만, 내게 아우구스티너는 맥주가 아닌 음식으로써 즐길 가치가 충분한, 취향에 맞지 않다 한들 맛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잔으로서 오롯한 만찬이다.




역에서 3시간의 숙면 후, 뮌헨에 도착해 내가 처음으로 향한 곳 역시 아우구스티너-켈러, 기대감에 오픈 1시간 전 방문했으나 열었을 리가 전무했고, 6월 묵었던 호텔 근처의 독일판 다이소에서 물리 실험에 필요한 자 하나와 그저 필요한 공책 하나를 구매했다.


1년 동안 살아갈 메츠의 지리는 2주 동안 머문 지금도 익숙지 않은 반면, 4일 간 농밀한 시간을 보냈던 뮌헨에서의 기억은 휘발되지 않아, 지도 없이도 뮌헨 중앙역을 거쳐 가게에 다다랐으니 그 작태가 오묘하기 짝이 없다.



다시 오픈 시간 10시에 맞춰 찾아가니 셀프서비스와 커먼 에리어(셀프서비스와 레스토랑을 제외한 비어가든의 영역, 정확한 표현은 모른다)는 아직 열지 않아, 별 수 없이 레스토랑에 앉아 헬레스 라거 한 잔을 마스로 주문했다. 셀프서비스는 11시 30분에, 커먼 에리어는 1시 가까이 돼서 영업을 시작했으니 구글 지도가 믿을 게 되지는 못한다.


반 잔이 아닌 1L 잔을 주문한 외지인에게 활짝 웃어 보이는 전통의상 복장의 직원.


이른 아침부터 마스 한 잔에 정신을 맡기고픈 사람은 없기에, 그 직원은 처음 내게 0.5L를 마실 것인지 물어보았다. 진정한 게르만이라면, 으레 아침을 1L짜리 맥주 한 잔과 시작하겠지만, 난 어딜 봐도 게르만은 아니어서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0.5L를 거절하고 1L를 주문하자 직원은 “That’s the right choice.”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저번의 독일 형님 한 분은 1L를 안 시키면 독일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듯, 내게 마스 한 잔을 주문할 것을 그리도 고집스레 요구했는데, 1L 정도는 마셔야 술을 마셨다고 치부하는 문화가 왠지 소주를 무식하게 집어넣는 한국의 문화와 겹쳐 보여 흥미로웠다.


독일의 비어가든을 이용함에 있어 알아두면 좋을 것이 있다면, 바로, 음식이 준비되지 않아도 맥주는 준비돼 있다는 점일 터이다. 주방 자체는 10시 30분쯤에 영업을 개시해도 맥주 한 잔은 그전에 내놓을 수 있는 게 비어가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선 맥주 한 잔을 건네받았다. 맛있는 걸 아는지 성가시게 잔에 들러붙다 결국 퐁당 빠져 버린 벌이 귀찮긴 했으나, 이내 나 역시 현지인처럼 잔 받침으로 마스를 덮어버렸고, 이후로는 만사형통. 테이블 위에 잔받침이 여러 개 쌓여 있는 건 서빙의 편의를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벌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겠다.



지난 6월 마지막으로 왔을 때 먹었던 치즈 소시지를 주문하고 싶었으나, 하필 레스토랑 메뉴는 주로 식사류로 구성돼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치즈가 올라간 바질 파스타를 주문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문을 여는 레스토랑 구획은 보통 자리가 다 차 있어 이용해 본 경험이 전무했는데, 슈바인학센, 프레첼 등 대표적인 독일 안주를 판매하는 셀프서비스 구역과 소시지를 필두로 비어가든의 시그니처 메뉴를 판매하는 커먼 에리어와는 메뉴 구성이 사뭇 달라 메뉴판을 탐구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데이라에서 만난 뮌헨 친구에게 듣기론 지하에 아름다운 식당이 존재한다고 하나 너무 이른 시간에 방문했기에 레스토랑 바깥의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건네받은 메뉴판은 총 두 개로 하나는 일반 메뉴판, 또 다른 하나는 특별 메뉴판이었는데 사시사철 메뉴가 통일된 아래 구획과 달리,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특별 메뉴가 두 개씩 준비돼 있었다. 요일 별로 위는 20유로 언저리의 육류, 생선류 요리, 그리고 밑은 10유로 언저리의 육류와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요리들로 구성돼 있어, 소비자의 지갑을 걱정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지갑이 두껍지는 않았기에 아래 위치한 파스타를 주문했다.



이윽고 들이켠 첫 잔.


원하던 온도는 아니었다. 약간은 미지근한 것이 차가움으로 목구멍을 완전히 쓸어내리기에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시원하게 목을 적시는 헬레스 특유의 깔끔함은 사라지지 않아, 기분 좋게 첫 모금을 즐길 수 있었다. 보리 잔향이 입 안에 남아 은은히 여운을 남기면서도, 마셨다는 자각 없이 술컹술컹 들어가는 맛이 독특한, 요약하자면 취하기 십상인, 좋은 맥주. 누군가 내게 라거를 정의해 달라 묻는다면, 대답하는 대신 내보일 맥주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양이 양이다 보니 한 잔에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꼴이라, 주의를 기울여 마셔야 하지만, 경험상 세 잔까지는 거뜬했기에, 별다른 걱정 없이 마셨다.



이어 나온 파스타는 독일 맥주 안주의 특징을 확실히 간직한 녀석이었다.


치즈가 붕붕 떠다니는 것이 파스타와 완전히 따로 논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줄 수 없는 데다, 밑까지 박박 긁어 포크로 소스를 입혀 먹어야 바질페스토 향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보유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염도 조절에 실패한 게 자명했다. 프레첼이나 소시지는 매일 내놓는 것이기에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지만, 되려, 요일별 메뉴인 파스타이기에 오히려 맛이 대단치는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는 요리로써 파스타가 가지는 한계일 뿐, 안주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맥주를 즐기지 않는다면, “무슨 파스타 맛이 이레?”라고 폄하할 수밖에 없지만, 맥주 한 모금에 파스타 한 포크를 곁들인다면, 염도가 이해 가는, 파스타로써의 맛이 아닌, 맥주와의 궁합만을 따져 만든 파스타. 맥주와 함께 하니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메뉴를 시킬 것 같은 어정쩡한 맛은 맥주와 함께 해도 숨기기는 어려웠다.


< 맥주 한 잔을 위해 버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 >


계산을 마친 후 커먼 에리어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당초, 열린다고 했던 시간은 11시였으나, 직원들이 12시가 넘어서야 출근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테이블에 앉게 된 건 1시가 조금 안 됐을 때.


< 연령대를 불문하고, 최고의 라거 한 잔을 마시기 전에는 나름의 의식을 치러야 한다. >


과정에서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자리에 앉지 말라는 직원과 언쟁을 벌였다.


(이기적인 난, 내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인종차별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아직까지 교육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굳이 제 얼굴에 침 뱉는 인간들이 많다고 생각할 뿐. 그러나 이번처럼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을 경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따진다.)


대략 1시간 전인 11시, 12시에 커먼 에리어가 열릴 것임을 확인받고 셀프서비스 에리어에서 대기하다 11시 50분경 입구 근처 테이블에 앉으려던 와중에 일이 터졌다. 직원 둘이 다가오더니, 준비가 덜 됐다며, 자리에 앉지 말 것을 요청했다.


당초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개점 시간은 11시였음에도, 이미 1시간을 기다렸고, 단순히 그저 준비가 덜 된 것이라면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바로 뒤 테이블과 옆 테이블에 독일인들이 이미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내가 테이블에 앉지 말아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12시에 오픈한다고 알려줘서 1시간을 이미 기다렸음을, 그리고 아무렇게 앉아 있는 독일인들은 방치하면서, 나만 콕 집어 일어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임을 지적했더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명은 독일어로 구시렁대었고, 나머지 한 명은 손으로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인종차별하는 거냐고 따져 물으니 그제야 잘못된 걸 느낀 건지 뒷걸음치더니 이내 저 구석으로 사라졌다.



열은 뻗쳤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의 법도라는데 따라줘야지. 그렇게 서서 45분 정도를 더 기다렸다.


미안한 건지 무엇인지 – 독일 남자들은 미안하다고 말하기엔 자기애가 너무 강한 것 같다. 5점짜리 맛을 갖고 있지만, 간혹 가다 지적받는 최악의 서비스로 1점을 허다하게 받아 4.4의 구글 리뷰 평점을 기록하는 아우구스티너 켈러의 웨이터들은 분명 그렇다 – 이내 아까 전 웨이터 중 한 명이 찾아와, 그렇게까지 서 있을 필요는 없다며, 아까 앉으려 했던 테이블에 착석할 것을 권유했다.


아니, 그새 청소를 더한 것도 아니고, 45분 간 바뀐 것이라고는 저린 내 다리와 땀에 젖은 셔츠뿐인데, 앉지 말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선심 베풀 듯 앉아도 된다고 하는 모양새를 보니 열이 뻗쳤다.


죽어도 미안하다 죄송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지, 맥주 한 잔을 내오겠다며, 기록적인 속도로 맥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흑맥주를 주문했건만 왜 라거를 들고 온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목이 말랐기에 들이켰다.


메뉴판 가져다주는데 20분, 맥주 나오는데 20분, 음식 나오는데 20분 해서 1시간은 기다려야 무엇이라도 입에 집어넣을 수 있는 평상시 저녁과 다르게, 잰걸음으로 맥주 한 잔을 잽싸게 가져오고, 이미 착석해 먼저 주문한 독일인들보다 내가 주문한 음식을 먼저 가져오는 것이 독일 남자의 사과였을까.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할 서비스에도 자리를 지킨 내 미련함의 이유는 맛 하나였다.


어이없게도 라거 한 잔에 피로가, 흑맥주 한 잔에 화가 풀렸으며, 소시지 한 입에 바로 다시금 행복해졌다.


라거는 깔끔하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스르륵 목을 타고 넘어갔고, 흑맥주는 자칫하면 더부룩할 수 있는 짭조름한 안주로서의 치즈 소시지와 완벽한 궁합을 자랑했다.


육향이라 할 건 없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끈적하면서도 미끄러운 치즈가 입에서 녹아내리고, 잘근잘근 씹은 후 삼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혓바닥을 잘린 소시지의 단면에 밀착시켜 풍미를 최대한으로 끌어온 후 흑맥주로 쓸어내려주면, 마지막에 슬쩍 내려앉은 알코올의 묵직함이 방금 내가 넣은 것이 안주고 마신 것이 술이라는 점을 넌지시 알려줬다.


술 아닌 척하는 술이 아니라 확실히 알코올로서의 정체성을 묵직이, 마지막에 드러내기에 만족스럽다고 할까.

소시지는 짜고, 치즈가 없을 경우, 더 짜지만, 불향 없이도, 그 풍미만으로, 바삭한 껍질의 고소함만으로 충분히 훌륭했다.




음식 주문은 안 받더라도, 맥주 주문은 먼저 받는, 마스 한 잔에 너도 나도 행복한 아우구스티너 켈러.


정석적으로 깔끔한 라거. 오로지 맥주와의 궁합만을 생각해 나오는 안주.


재수에 옴 붙으면 마주하는 무례한 남자 웨이터들의 불친절한 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음식 하나만으로 그 평판을 유지하고 있는 그곳에서의 맥주 한 잔을, 그곳에서 만의 맥주 한 잔을 위해 난 다시금 아우구스티너 켈러를 찾게 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맥주 한 잔의 낭만을 찾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