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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04. 2023

길을 잃었다.

떠나옴

이른 아침의 평안이 내려앉아 고요한 메츠의 거리, 그 거리에서 길을 잊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배기음은 흐려져 가고, 적막하리만치 고즈넉한 일요일 아침의 거리에 멈춰 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한 보. 나아가거나, 뒤로 한 보, 물러서거나. 갈라지지도 않는, 그저 따라 걸을 뿐인 일직선의 도로 위에 서, 어쩌다 길을 잊어버렸는지 자문해 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스미웠고, 다시금 나는 앞으로 걸었다.


그저 따라 걷기만 해도 되는 도로 위에서 길을 잃은 경위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관성적으로 떠나오고 떠나가다 보니, 더 이상 내 족적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돼버린 걸까. 나아간다는 행위에 집중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걸까.




제대 후 처음 떠난 유럽 여행은 다분히 과시적이라 몇 줌의 추억과 거덜 난 통장 잔고만을 내게 남겼지만, 이후의 여행들은 달랐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인연의 중요성을 배웠고, 조르바처럼 뛰놀았던 갈라파고스에서는 자유라는 가치가 갖는 의미에 대해 숙고했으며, 코로나로 모든 계획이 틀어진 코스타리카에서는 난생처음으로 모든 계획을 집어던진 채 즉흥적이고 유연한 삶을 맛보았다.


바하마의 뙤약볕과 스콜 아래, 니카라과 마나과 공항의 지붕 아래, 물이 없든, 너무 많든, 머리 뉘일 곳 하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존력을 확인했고, 도미니카 공화국 바야히베 해변에서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과테말라의 아카테낭고를 오르며, 힘들어하는 친구의 배낭을 대신 짊어졌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유럽에서는 가이드 노릇을 톡톡히 하며,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에 어설픈 이타를 끼워 넣었다.


옥스퍼드에 잠시 착륙했지만, 이내 방랑벽이 도져 몰타, 키프로스, 불가리아 등지로 떠나 지중해와 동유럽의 문화를 경험했다.


유럽의 서쪽 끝, 아조레스에서 광활한 어머니 자연의 숭고함을 되새겼고, 마데이라에서는 지역 축제에 참여해 당분간 찾아오지 않을 극한의 행복을 맛봤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이러한 사치를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지금 아니면 나중에 갈 수 없다는 압박이 나를 죄여와 도망치듯 떠난 적도 많고,


변수 많은 인생길에서 그나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여행길에 오른 나 자신뿐이기에


일상에서의 평범한 내가 부끄러워 떠난 적도 많다.


그럼에도 여행의 끝에서 난 늘 한 뼘, 두 뼘 성장한 나 자신을 마주했다.




얼마 전 걸려 온 전화에서 친구 녀석이 뒤숭숭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애정 섞인 조언을 여럿 던지기도 했으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주는 달콤함에 절여진 나는,

내일의 여행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노마드,

일상으로써의 여행이 아닌, 여행으로써의 일상을 꿈꾸기에,

주말이면 배낭 하나를 챙겨 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자유를 얻은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관성적인 여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 그 속에서 아득바득 설명을 찾으려는 난 끝내 길을 잃고 말았다.


'세상은 넓고 가볼 곳은 많다.'는 무심히도 가혹한 명제는 정작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주위의 기대에 맞춰 깔아놓은 그 길이 내 길이긴 해도,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를 괴롭히고, 나는 다시금 잊어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길을 찾아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누빈다.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머리 뉘어 쉴 곳이라도 찾아보겠다는 절박함이 나를 충돌질한다.


맥주가 시원한 뮌헨이라면 좋지 않을까, 맥주 한 잔을 위해 뮌헨으로 떠날 수 있는 삶은 분명 매력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렇게 뮌헨을 '잠시' 찾았다. 여행의 본질은 일탈이기에 잠시 머물고 떠나야 함을, 그 이별에 익숙해져야 함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그제의 맥주와 어제의 맥주는 달았지만, 술로 뇌를 적신 다음 날의 아침은 우울하다.


< 6월, 술에 취한 채 친구와 찾았던 뮌헨의 버거 킹 >


늘 술을 마셔 그렇다며, 고독에 절여진 채 방황하는 나를 달래 보지만, 파울러너 한 잔, 호프브로이 한 잔, 아우구스티너 한 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잠시간의 유희에 정신을 내맡긴 대가는 가혹하고,


이미 달아난 취기 아래, 나는 이역만리 프랑스 메츠 도로 한복판에서, 그저 따라 걸으면 될 뿐인 일직선의 길 위에서, 설명을 요구해 오는 길들에 머리를 지끈 부여잡았다.


명징히 관조할 수 있는 건 내가 떠나왔고 또 떠나갈 것이라는 것뿐.


이번의 뮌헨 여행은 나답지 않게 다소 즉흥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참으로도 낭만적이었다.


적게는 한 분기, 길게는 1년 전부터 여행을 계획하는 내가 1주일 전에야 버스를 예매하고 숙소를 알아본 후, 별다른 계획 없이 맥주를 마시겠다는 다짐 아래 훌쩍 떠났으니 일상에 여행을 스미울 수 있어 진정 기뻤다.


그럼에도 짧은 일탈 끝에 서, 이다음은 무엇인가, 또 그다음의 다음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없어 허망하다.


사실 답은 나와있다.


매일 집에 박혀 내일 없는 오늘을 살아가시는 부모님을 보면 그다음이 무엇일지는 자명하기에 '길'에 매달린다.


젊은 날의 일탈은 졸업과 함께 끝날 터이고,


그다음의 일상은 뻔히 보이지만,


답이라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무겁고 냉혹해 - 내겐 답일 수 없어 - 어쩌면 길을 잊었노라, 잃어버렸노라 합리화하고 마는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 주방으로 나가 어머니가 끓여주신 전복죽을 먹었다. 잊고 지냈던 그 죽 한 그릇이 어찌 이리 머릿속을 맴도는지 알 수 없다.


이리 멀리, 또 오래, 떠나오고도 염치없이 집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 고향을 찾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지금의 이유 모를 우울감도, 맥주 몇 잔에 툭 튀어나와 버린 고독함도, 일상에 묻혀 지워내겠지만,


다음의 떠남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지워내겠지만,


그럼에도 한 번 잊어버린 방향감각은 쉬이 돌아오지 않아


어쩌다 승학산 아래서 메뚜기 잡고 다람쥐 쫓던 내가, 배낭 하나만 멘 채 이리도 떠도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있던 길을 잊은 건지 그저 길을 '잠시' 잃은 건지 알지 못하는 나는 결국 그렇게 관성적으로 다시 떠난다.


떠나지 않고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생각하기에, 진정 어른으로 거듭나길 강요당한 후에는 이러한 고민마저 사치일 것을 알기에, 길을 몰라도 떠난다.


자발적으로 떠남을 종용받는다.


여행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작년의 난 배움을 위해서라 답했었고, 올해의 난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라 답해왔다.


그러나, 방향을 잃은 지금 난 그저 떠나지 않을 수 없어 떠난다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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