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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01. 2023

맥주 한 잔의 낭만을 찾아

야간버스에 실려

2023. 08. 31,


모든 것을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고, 실천함으로써 흡족해하는 나라는 인간이 여행을 계획함에 있어 유일하게 마주하는 문제는 허리와 돈이다.


< 내년 여름의 계획. 이미 짜고 있다. >


세르비아 왕복 항공권이 한국 돈으로 4만 원도 안 하고, 캅카스 산맥이 붙어 있는 조지아행 항공권이 40유로이며, 가깝긴 해도 다른 대륙에 붙어 있는 모로코행 항공권이 3만 원 정도 하는 유럽에서,


(유럽의 비행기 푯값이 싸다는 걸 모르시는 부모님께서는 11월 포르투 왕복 항공권이 5만 원이라는 내 말에 50만 원을 잘못 얘기한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셨고, 여전히 아들놈이 과장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다.)


미리 계획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유럽인의 바캉스는 8월 말까지 길게도 늘어져,


나로 하여금 기차와 버스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2호선에 실려 있는 동안 가지 않을 곳, 혹은 가보지 않을 곳을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겠다는 일념 아래


대략 한 달 전부터 8.31일부터 9.3일의 계획을 숙고했다.




당초 마음에 두고 있었던 선택지는 두 개.


이탈리아에 가 이탈리안 알프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돌로미티(Dolomites, 발음이 돌로미틴지 돌로마이츠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를 찾거나, 슬로베니아에 가 포스토이나(Postojna) 동굴과 블레드 호수(Lake bled)에 들르는 것.


그러나 개강 후 여행이 2주일 정도 남은 시점에서 돌로미티 근처 호텔의 숙박비는 박에 100유로가 넘어갔고, 호스텔은 찾아도 찾아도 나오질 않았다.


슬로베니아의 경우, 숙박비는 박당 30유로 정도로 합리적이었으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행 기차를 잡아탄 후 버스로 11시간 25분을 가야 했다. 과테말라에서 8시간에서 10시간 가까이 되는 버스에 타본 경험이 있긴 하다만, 연기되기 일쑤인 플릭스버스(Flixbus)의 특성상 실제 이동시간은 12시간을 초과할 게 뻔했기에, 왕복에 하루가 넘는 시간을 태울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허리를 감안하면 결코 선택해서는 안될 악수.


그래서 생각한 대안은 리히텐슈타인. 총 소요시간은 버스로 8시간이나 중간에 1시간 정도를 쉬며, 버스 가격 자체도 왕복 70유로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기에, 수도 바두즈(Vaduz)로 가기로 결정을 내린 후, 교통편과 숙박비를 알아봤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1. 취리히(Zurich)에서 바두즈로 기차로 넘어가거나 차량 공유 플랫폼인 블라블라카(Blablacar)를 이용해야 한다.


2. 취리히의 숙박비는 80유로에서 시작하며, 바두즈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3. 보수공사로 인해 실질적으로 하나뿐인 관광지, 바두즈 성에 못 들어간다.


는 것…


결국 갈 곳이 마땅치 않다면, 기숙사에 남아서 공부나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문제의 기네스 >


그럼에도 이 놈의 방락벽은 나를 계속 충동질해 메츠 시내에서 친구 녀석과 기네스 한 잔을 홀짝이다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기네스의 고향 더블린(Dublin)은 머니 야간버스를 타고 뮌헨(Munich)에 다녀오기로.


2주 후 옥토버페스트에도 갈 예정이라지만, 뭐 어떤가. 맥주가 당기는데 가서 마셔야지.


지난 6월 아우구스티너 켈러(Augustiner-Keller)에서 들이켰던 라거의 상쾌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기에 금주가 아닌 4일간의 절주를 선언한 내게, 맥주라는 두 글자가 머리에 박힌 순간부터 답은 사실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야간버스 티켓 두 장을 구매하고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마련된 30세 이하 전용 숙소, 더 텐트(The tent)의 침대 하나를 예약한 후 뮌헨행 준비를 마쳤다.




8월 31일 21시 55분, 버스는 메츠를 떠나 뮌헨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명불허전, 기대를 배신치 않는 플릭스 버스는 그 도착이 20분 연기되었고, 출발 1시간 전, 20시 55분, 버스가 늦게 도착하리라는 사실을 확인한 난 9시 35분경 기숙사를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우산을 쓰기에도 안 쓰기에도 애매하게 땅을 적시는 게 불안했다.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도보 30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기숙사 출입문을 열어젖히며 확인한 버스 시간은 웬걸, 다시 21시 55분.


배낭을 손으로 붙든 채, 발에 불이 붙도록 뛰었다.



그렇게 메츠의 밤거리를 기록적인 속도로 주파하며 도달한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 한 대. 21시 54분에 도착했으니 당연히 내가 탈 버스이겠거니 한 나의 오판.


듣자 하니 사고가 나 정차한 다른 버스라고 한다.



22시경 도착한 버스는 블라블라카에서 운용하는 버스였고,



22시 10분이 다 돼서야 마침내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지인은 나뿐이라는 듯, 인기척 없이 22시 5분에 나타난 프랑스인들을 보며 감탄했다.


버스 도착이 늦어질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예측해, 버스 도착 5분 전에 하나둘씩 정류장에 당도했으니 실로 놀라운 시간 감각이 아닌가.


연착, 연기를 사고회로에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사는 프랑스인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다 편안한 자세를 찾느라, 또 오지 않는 잠을 부르려 책을 읽다 도합 2시간을 허비한 후, 버스 의자에 앉아, 매 정거장마다 깨며, 우여곡절 끝에 뮌헨에 도착했다.


스산한 새벽 공기가 뼈를 스미웠고, 나는 추위를 피해 인포 센터로 달아나, 고되었던 야간 버스에서의 잠을 벌충해 줄 3시간의 숙면을 청한 후 일어났다.


일어나니 간밤의 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다시 한번 찾아올 행복한 낮술의 시간을 암시하듯, 밝디 밝은 해가 중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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