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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08. 2023

공항으로

떠나는 기분

지하로 내려갔다 올라오니 밤이었다.


심지에 붙은 마지막 불꽃처럼 장렬히 타오르던 파리의 태양은 낭만도 없이, 볼품도 없이 꺼졌고, 어슴프레 내린 밤의 푸른빛 재가 대신 하늘을 매웠다.



1994년 놓인 철로 위를 달리는 1977년제 깡통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냉방 따윈 기대할 수 없는 호졸근한 기차에 실린 난 이내 유일하게 열려 있는 창가의 자리로 몸을 끌고선 빼꼼 고개를 내민다.


바람에 숨을 맡기기를 여러 번. 누런 형광등 아래 서, 불현듯 유일한 숨통이 차 안을 뿌옇게 물들이는 매연의 근원임을 자각한 난 다시 자리에 앉는다. 가끔 손을 내밀어 바람을 쐬려 시도하지만 사실 차이는 없다.



공항까지는 네 정거장.


귓등을 타고 내려오는 땀을 닦으며, 정거장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려 고개를 돌린다.


점과 선이, 선과 면이, 뿌연 빛무리 아래 교차하고, 치지직 끊어지는 라디오 같은 저 것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낯선 형체에 가깝다. 보이는 것이라곤 철로 마디 사이를 채운 검푸른 물과 자갈들 뿐.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그저 고저에 따라 고인 건지도 확실치 않으며, 본디 검은 것인지 검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차창 밖의 다른 시간이 흘러간다.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금 책에 코를 박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간간이 들려오는 열차 방송에서 되풀이되는 몇의 음절, 그리고 열차가 고장 나지 않는다면 내가 어딘가에 도착하리라는 사실뿐이다.


열차의 종착지는 종점.


끼릭거리는 열차의 철문과, 희미하게 잡혀오는 엔진 소리, 그리고 터널 아래 배가되는 철로의 파열음이 귀에 잡히고, 가끔 지나치는 열차의 달음박질은 어쩐지 무기력하다.


내리는 사람은 느는데, 타는 사람은 줄고, 안내방송은 길어졌다.



떠남은 도착과 이어져 있기에, 센 강변에 정차했던 나의 시간은 잠시 끊겼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다시 흐르고,


떠나라는 부름에 굴복한 난, 멈춘 기차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겨 낮과 밤의 경계가 희미해진 그곳에 도착했다 눈 붙일 곳을 찾아 밤이 내린 공항의 빛 속을 배회한다.


공항에서 맞는 14번째 밤이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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