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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Sep 28. 2023

9개월, 24개국 주파.

정리의 필요, 기록의 쓸모

원래 계획은 휴학, 워홀, 그리고 세계일주였다.


나라는 인간은 나약하기 짝이 없어 1년간의 고됨만으로 학업을 중단할 이유를 찾았고,


돈을 벌어보며 학교라는 곳이 얼마나 괜찮은 장소인지 체감해보겠다,


그리고 젊은 날 잊지 못할 경험을 남기겠다는 변명 아래.


부모님 가라사대  '허황됨 꿈'에 젖어 휴학을 꿈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경쟁에 혼이 갈려 나갔던 고등학교 때도 나의 휴학을 막았던 부모님은, 전형적인 아시아 부모님답게 이번에도 나를 막아 나섰고, 내게 소위 말하는 '현실감각'을 다시 심는 데 성공하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건대, 결과적으로, 명시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으나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이제 암묵적인 합의가 하나 자리 잡은 듯하다.


바로 여행은 하되, 학업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


가끔 짧은 통화 속에서 학업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시는 어머니와, 그럼에도 다시 안 올 시간이기에 여행도 다니고 공부도 해라 하시는 아버지의 대비가 재밌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여하튼 종합하자면 결론은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해라쯤 되겠다.



어머니는 젊은 날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1년 하셨고,


아버지는 덴마크에 사는 고모를 보러 1980년대였나 90년대, 독일을 거쳐 덴마크를 찾았다고 하니


(그간 일언반구도 없으셔서 덴마크에 사시는 고모님께 이번에서야 처음 들었다. 영어도 못하시는데 어떻게 여행하셨는지는 의문)


우리 집안에는 여행가의 피가 흐른다 할 수 있을 터이고,


어릴 때부터 지도 하나 들고 주말이면 전국을 누비고, 뉴칼레도니아, 타히티, 장가계, 터키 등 여러 이국적인 곳을 여행했으니


이 집안의 아들내미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함을 넘어 필연적이었다고 이해하신 것일 수도 있겠다.


가장 중요하게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내게 더 이상 강요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관용적이고 내 여행을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다.


여행과 학업을 병행하는 여름학기를 굳이 찾아 듣고, 분교가 위치한 프랑스 메쓰까지 오려 별의별 노력을 다 한 나 자신의 공도 있겠지만, 부모님께서 정신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말도 안 되게 많이 돌아다녔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올해 다녀간 국가 수가 24개국에 이른다.



코스타리카, 바하마,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과테말라,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몰타, 키프로스, 아일랜드, 불가리아, 미국, 룩셈부르크, 튀니지.




유럽에서 여름학기를 들었고, 지금은 프랑스 북동부 메쓰에서 수업을 듣고 있기에 여행지가 대부분 유럽에 쏠려 있긴 하지만, 중미, 북아프리카, 그리고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등 나름 다양한 곳을 여행한 지금 내가 글을 씀에 있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시간이다.


마찬가지로 브런치 작가인 친구와 내기를 해 매달 10편이라는 할당량을 채우는 것 자체는 만족스러우나, 학업에 여행에 글까지 쓰려니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는다.


가끔 잠깐잠깐 짬을 내서 글을 쓰는 유형이 아니라 최소한 한두 시간은 의자에 진득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여행을 다니기 위해 비워놓는 주말에 뭔가를 쓰자니 호스텔 밖을 너무 자주 활보하고 다니고,


< 물리 시험을 쳐낸 어제의 저녁 또한 라면이었다. >


그렇게 주말에 공부를 안 하려고 기를 쓰다 보니 막상 평일에는 글을 쓸 시간은커녕 밥 한 끼 지어먹을 시간도 부족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다.


물론 아버지 말마따나 쥐고 있는 휴대폰 사용시간을 줄이면 능히 해결될 문제 이긴 하나, 평일의 유일한 오락거리를 스스로 빼앗고 싶지는 않다.


겨울방학에 귀국하면 몰아 쓸까도 싶지만 막상 가면 이리저리 가야 할 곳도,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할 분도,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여야 할 친구도 많기에 미루는 건 분명 하책.


중간중간 그때의 감정을 사진에 담아 사진과 기억을 연결 지어 놓기에 그나마 글을 끄는 게 수월하기는 해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소재들이, 내가 글로 녹여내지 못한 주제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적당히 돌아다니는 것만이 답이겠지만 이미 12월까지의 모든 여행 계획을 세워놓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 글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어 오늘도 글은 저 뒤 편으로 잠시

미뤄놓고 일단 떠나본다.


< 지난 주말, 튀니지에서, 여행은 신속하게, 달리 말하면 제대로 못하고 물리 공부를 했다. >


당장 어제오늘 중간고사를 하나씩 쳤고, 다음 주 화요일과 수요일 또 다른 시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일단은 떠나, 다시 한 번, 내일의 나에게 내일의 일을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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