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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27. 2024

눈을 파먹었다

카즈베기 산

등산 전날 늦게 자는 것도 고질병이라면 고질병이다.


갈라파고스의 검은 산을 오를 때도, 코스타리카의 이라주 화산을 탈 때도, 니카라과의 콘셉시온 화산을 등반할 때도, 과테말라의 아카테낭고를 정복하러 나섰을 때도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다 두 시가 넘어서야 눈을 붙였었다.


가학적인 산행의 과실은 달다. 무거운 몸을 끌고 정상에 다다라 준비해 온 샌드위치 한 입 베어 물면, 그만한 쾌락이 없어, 이대로 누워 눈을 감아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가끔 든다.


< 달 >


오늘도 다를 바 없다. 새벽 세 시까지 책을 읽다 깜빡 졸다 일어나니 해는 아직 산을 넘지 못했고, 먹다 남은 빵 조가리 하나, 반쯤 빈 페트병 하나 덜렁 챙겨 산의 초입으로 걸어간다.


나로 하여금 발꿈치를 들고 밝지 않은 화면 빛에 기대 짐을 주섬주섬 챙기게 했던 - 여전히 곤히 잠든 - 저들과 달리, 게르게티 산골 마을 사람들의 하루는 벌써 시작했다.


조금 걸었을까, 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아저씨 하나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답답하다는 듯 손을 휘적이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길을 잘못 든 모양인데, 어차피 오르면 만날 길이건만,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 필생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 구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몸을 직각으로 튼 후 팔을 뻗어 경례라도 하듯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짚어내니 씨익 웃고선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 올라간 창문 너머 환한 안광을 보니 꽤나 흡족해하고 있다. 굳이 여행자의 뒤를 쫓아와 소리를 쳐서 방향을 알려주고는 떠날 수 있는 게 그들의 여유리라.


반면 나의 산행에는 여유 따윈 찾아볼 수 없어, 해가 지기 전 저 산에 걸린 만년설에 닿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발을 놀려야 한다.


< 게오르기 츠민다 사메바 교회 >


닭이 울고 개가 짖어, 여행자의 아침을 깨울 때 나는 이미 산을 오르고 있다. 해가 등선을 타고 넘어오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차의 수도 강렬해지는 햇살에 발맞춰 늘어만 간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차도를 걷고, 샛길을 따라 교회에 다다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해발 2170미터의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뒤로 설산이 펼쳐진다.


< 자줏빛 산 >


오르고 또 오른다. 산 넘어 구렁, 구렁 넘어 산. 잠시 앉아 빵을 뜯다 앞서 가던 등산객을 놓쳤다.


< 조지아의 십자가는 굽어 있다. >


내려오는 길에 마주치게 될 테지만 물이 떨어진 지금, 이름도 모를, 잠시 실례한다며 물 한 모금을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하나를 놓치니 애가 타는 게 나의 간사한 마음이다.


그래서 눈을 파먹었다. 눈을 ‘파’ 먹었다.


파는 행위는 떠나온 그곳과 돌아올 그곳 - 흙, 먼지, 고운 입자 - 과 피상적으로 맞닿아 있어 묘한 울림을 주고,


먹는 행위는 더없이 본능에 충실한, 동물적 행위라 겸허해지는 구석이 있다.


살기 위해라 포장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여하튼 그럼에도 목을 축이고자 땅에 내린 눈을 파 씹어먹은 지금, 입안을 굴러다니는 얼음알갱이에 이가 시려오는 지금, 내 생으로의 의지가 더없이 선명함을 깨닫는다.


길은 산을 왼쪽으로 두고 굽이 돈다.


좌로 한 걸음 내딛으면 밟던 길이 이어지고, 우로 한 걸음은 낭떠러지로. 그리 생각하니 눈을 파먹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 다리 아래 물이 흐른다. 나에게 손짓하는 폴란드인 자매 >


산장에 다다르기 전, 빙하 녹아 내려오는 물을 병에 가득 담아 벌컥 들이켰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땅이 녹기까지 영업을 중단한다는 산장 주인의 말을 핑계 삼아 하산을 준비한다.


< 몸을 녹인다 >


1시간만 더 오르면 만년설에 닿을 수 있건만 기분이 영 내키지 않고, 따뜻한 수프로 몸을 적시며 폴란드인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만 내려가도 좋겠다는 합리적 변명이 고개를 든다.


지금은 따스히 방문객을 환영하고 있으나, 일몰 후의 산은 언제 그랬냐는듯 돌변하기 마련이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발을 잘못 디딜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게 겁 많은 나의 핑계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다음을 기약한다.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프랑스인 남자 하나와 두런두런 수다를 떨었고, 어쩌다 보니 같은 숙소인 이탈리아 남자 하나와 저녁을 함께 했다.


물 살 돈 아까워 눈을 파먹다, 물을 받아 마시다, 결국 이탈리아 남자가 건넨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인 나의 하루가 그리 지나간다.


관대했던 하루의 끝, 레모네이드가 달지만은 않고,


가난한 여행자의 분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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