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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y 04. 2024

어디서 어딘가

2023. 11. 01: 방랑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쉬이 답하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안면을 트기 위해 가벼이 던지는 질문은 어디로부터 떠나왔나, 어디에 발붙여 살아왔나 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그저 “코리아, 낫 노스”라 받아치기에는 무거웠고, ‘한국’ 혹은 ‘미국’, 이지선다로 좁혀 생각한들 마음은 고향 부산에, 몸은 머문 미국 사이에서 어정쩡히 표류해 어찌 답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에콰도르에서 코스타리카로 건너간 날, 숙소에 체크인하며, 어디서 왔냐는 주인장 할아버지의 물음에 “갈라파고스에서 왔습니다.”라며 멍청히도 정직한 답변을 했더란다.


과테말라를 함께 여행한 동창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되지, 무엇을 그리 고민하냐?”며 핀잔을 줬지만, 선뜻 한국이라 답하기에는 언어, 입맛, 그리고 생김새만 한국인일 뿐 문화적으로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내가 한국임을 자칭하는 게 사칭하는 것만 같았다.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어, 아루바에서 왔다는 호스텔의 남자에게 물으니,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미국이라 보긴 애매한 푸에르토리코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그럼에도 1년 전 정착한 아루바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뜻깊어 (meaningful) 자신을 아루바 출신이라 정의한다 답해왔다.


더불어, 어디에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을 느끼는지 되물어 왔는데, 우물쭈물거리다 “그걸 모르겠어서 문제야.”라고 속내를 툭 내뱉었다.


내가 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고 방랑이며, 떠나갈 곳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라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답변 따위는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참 했더란다.



지난 5월의 유럽행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는커녕 가중시켰다.


미국 대학의 유럽 분교에서 공부하는 한국 출신 학생 – 영어, 중국어, 한국어는 구사할 수 있으나 불어는 구사하지 못하는 –이라는 기괴하고도 요상한 처지에 놓여있어, 어디서든 “웨어 어 유 프럼?”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내가 조금 더 한국인 같으면 한국, 미국인 같으면 미국이라고 답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러다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 이내 대본을 하나 정해 외우고 다니기 시작했다.


분교는 교환학생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다는 살을 붙이면, 세 가지 정보를 모두 담은 대사 한 줄이 나온다.


“음. 복잡한데, 본디 한국 출신이나 미국 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지금은 잠시 1년 간 유럽에서 교환학생 생활 중이야.”(“Hmm. It’s complicated. I’m originally from South Korea, but studying Aerospace in the states, and currently doing an year long exchange program here in France.”)


대화에 재미를 더하고 플 때면, “짧은 걸 원해, 긴 걸 원해?”(“Short version or the long version?”)라고 운을 띄우며, 결국은 같은 대사를 뱉는다.


여행자들은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 족속들이라 여태 짧은 걸 원하는 경우는 접하지 못했고,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둘 다 들려달라는 경우인데, 이러나저러나 전달되는 정보의 총량은 변치 않는다.


이어 던져오는 질문은 둘 중 하나. 구체적으로 어디의 어디인지를 묻거나 로켓을 좋아하냐고 묻는데, 미국의 애틀랜타나 프랑스의 메스나 지루하기는 매한가지고, 부산은 – 두 번째로 큰 남쪽에 붙어 있는 항구 도시 – 설명을 곁들여야 해, 결국은 질문의 바통이 내게 넘어온다.



마데이라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는 코모 호수 근처의 어딘가에 살고, 지역 맥주 축제가 옥토버페스트보다 정겹고 좋다던 독일인 친구도 뮌헨 근교의 어딘가에 살지만, 그 어딘가의 지명을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의 부산 역시 타인의 시선에서는 또다른 ‘어딘가’ 일뿐이고, 실상 어디여도 큰 상관은 없는 것 같다. 감천문화마을 얘기를 하던 독일인의 사례도 있지만 이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로켓에 대한 이야기의 귀결도 바람직하지만은 못한데, 이건 진부하기 짝이 없다. 가장 가볍게는 수학을 잘할 것이라는 단언과 스페이스 X에 취직할 거냐는 물음이 주를 이루고 (미국 시민이 아니라 못한다), 더 나아가서는 화성 이야기가 십중팔구 나온다. 터빈의 작동원리에 대해 물었다 한들 멋들어지게 수식을 곁들여 젠 채 하며 설명할 자신도, 지식도 없고, 그렇다 한들 방위산업의 폐쇄성과 국익 보호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이 쪽에서 질문을 하나 던지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만다.


조지아 아저씨의 웨어 어 유 포름과 중국인 여자의 웨 유 프럼 사이에 내 머릿속을 휘저은 건 이런 류의 잡다한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가 잠시 술을 챙기러 간 사이, 말똥거리는 눈동자의 중국 여자는 비음 섞인 발음으로 "웨 유 프럼?"을 던져오고 나는 “짧은 걸 원해, 긴 걸 원해?”라고 되물으며, 장단을 맞춰준다.


외워둔 대사를 뱉으니 이번에는 질문이 양쪽에서 들어온다. 여자는 부산이 어디 붙어있는지 물어오고, 공대 출신 남자는 로켓을 좋아하는지 물어온다.


“너는?”이라 되묻고 보니 앞으로 반 시간 여의 대화가 뻔히도 그려져, 설산의 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형극에 끌려와 조종당하는 것만 같지만, 뾰족한 다른 수도 없고, 결국 내가 내뱉은 말도


“Where are you from?”.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내게서 나온 질문이라, 중국인임을 알고 던진 질문이라 생각하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


한 명은 베이징, 한 명은 허난이라 하는 걸 보니 그래도 아주 잘못된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이고,


미국물 조금 묻은 것 제외하곤 다를 바 없는 질문 하나에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며,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궁금해 하게 되는, 궁금해 해야 하는 시간을 흘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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