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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y 11. 2024

다시 트빌리시로

숙취

필름이 끊긴 모양이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니 건너편 침대의 중국인이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다.


같이 마슈룻카를 타고 트빌리시로 넘어가자던 말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사과의 말을 건네며 묻는다.


“별일 없었지? 혹시 깨거나 한 것도 아니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고개 저으며 별일 없었다며, 자정도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그. 그럼에도 깨어있었다는 말에 괜스레 불안해지고


“아 하나 있긴 했다.”라고 말하며, 잠시 뜸을 들이자 이불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숙면 외의 주사라도 하나 생긴 건가 싶어 흠칫하지만, 거품 꺼져 버린 맥주 같은 내가 그럴 일은 없고, 이에 재차 묻자, 그제야 부엌 옆을 지나치다 본 광경을 설명한다.


처절한 대작 끝에 패배해 책상에 엎어진 아저씨는 내버려 두고, 귀한 와인이라도 따르듯 2L들이 페트병을 천천히 기울여 잔에 맥주를 채우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30분 내로 준비를 마치겠다 얘기한 후 방을 나서니 마침 어제의 아저씨도 일어난 모양이고, 얼굴만 봐도 뻔히 보이는 안부를 묻는다.


원래도 거뭇했던 수염자국에서 포기 몇 어지러이 돋아나 깎다 만 잡초처럼 삐죽하고, 피부가 가죽 너머 까슬한 거죽만 같지만,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건 설산 진창처럼 흙빛으로 누렇게 뜬 그의 안색이다.


생사여부를 묻는다.


“살아계신가요? (Are you alive?)”


고개를 젓고는,


“넌 그래 보이네. (At least you seem to be so.)“라 웃음 지으며 말하며 사라진다.



나갈 준비를 마친 후 인사를 건네려 방에 들렀더니 다시 잠에 든 모양이고, 마슈룻카는 관광객 둘, 일꾼 셋, 할머니 하나를 싣고 수도 트빌리시로 떠나간다.


그리고 암전.


어제의 기억이 흐릿하다.


중국인 남자마저 패배를 선언하고 방으로 돌아간 후, 거리로 나가 2L들이 페트병에 맥주를 두 병, 자잘한 캔 여럿을 담아왔고, 붓고 마셨다.


밤새 몇몇 친구에게 연락이 온 모양이지만,  답장하지는 못했다. 페트병은 치워두었고, 컵 두 개도 깨끗이 치워두었던가, 확실치 않다.


차는 굽이진 산길을 따라 달리고, 덜컹일 때면 속을 왈칵 게워내고 싶지만, 겨우 참아내고 얕은 잠에 든 채 트빌리시로 달려간다.


하루 종일 나는 말이 없다.


목이 타듯 건조해 한 마디 내뱉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나 모든 여행에는 그 끝을 자각하는 순간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우수에 찰 때면, 말이 가벼워져 차마 뱉을 수 없다.


차가 지나감에 따라 내가 뒤로 남겨둔 저 풍광들이, 카즈베기의 설산과, 게르게티 마을의 순박한 시골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산맥 뒤로 숨어버리고, 트빌리시의 잿빛 건물과 쿠라 강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여행의 끝을 직감한다.


하룻밤 그리고 이틀이면, 쿠타이시로, 밀라노로, 바젤,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메스로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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