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1: 가우마르조스
술자리에서, 더군다나 상대가 중국인이라면, 분위기를 가볍게 풀고자 던지는 말은 정해져 있다.
기다리던 술이 온 모양. 설산이 박힌 카즈베기 맥주 두 캔, 그리고 500ml 페트병에 담긴 조지아 전통 주 차차.
캔을 열고, 기울여 술을 따른다.
아무 말 없이 씨익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린 후 잠시 그대로 멈춰서 다른 쪽 - 오늘은 조지아인 - 을 쳐다보며 물으면 된다.
그대들의 언어로는 건배가 무엇이냐고.
독일인에게 이미 여행을 많이 다닌 티를 낸 날에는 ‘눈을 마주치며’ 잔 아래를 부딪힌 후 “프로스트”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반쯤은 먹고 들어가고, 프랑스의 상테는 악명 높은 언어에 비해 발음이 비교적 쉬운지라 그저 내뱉으면 그만이며, 스페인어의 친친 역시 마찬가지.
다만 조지아인 남자의 대답은 간단했던 감사합니다 - 마들로바 - 와 달리 ’가우마르조스‘. 술을 마시며 일상적으로 뱉기에는 많이 길었고, 그렇기에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뒤이어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일본인도 있다면 완벽하겠지만, 그들은 좋은 여권을 갖고도 나라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 중국인으로 만족한 채 묻는다.
그대들의 언어로는 건배가 무엇이냐고.
간베이 (乾杯).
‘건강을 비는 의미도 있지만, 잔을 깨끗이 말리자, 건조하다는 뜻도 있다.'라는 비화까지 알고 있는 내가 굳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흥미 그뿐이다.
유사하면서도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지닌 세 나라가 같은 말로 건배를 외친다는 사실이 참으로 오묘하다. ‘잔을 든 자 모두 친구여라.‘ 프로스트, 상테, 친친, 그리고 가우마르조스의 간격이 건배, 간베이의 간격만큼 줄어들 때까지 우리는 웃고 떠들고, 마신다.
조지아인 아저씨는 아들과의 소원한 관계를 걱정하고, 중국인 여자는 남자친구를 안심시키느라 여념이 없으며, 10년 지기 친구를 자처해야만 했던 공대생 남자가 연신 “내가 잘 챙길게.”라고 확언한다. 정도만 다를 뿐 다 취한 건 마찬가지고, 갑자기 조지아인 아저씨가 일어나며 식탁을 내리치고는
“조지아는 물이 좋아서 술이 맛있지.”라고 선언한다.
이내 페트병을 찌그려 단숨에 40도의 차차를 비우고서는
“물 마시듯 마셔보자고.”라고 활기차게 말한다.
건배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시작했던 여행객들과의 여타 술자리와 다를 바 없이 오늘의 시간도 흘러간다.
중국 사람은 술이 강하다는 풍문을 듣기라도 한 건지 조지아인 아저씨는 맥주 두 캔을 본인 앞에 하나, 그리고 내 앞에 하나씩 밀어뒀고, 찬장을 뒤적이다 컵을 꺼내 중국인 둘 앞에 놓았었다. 이제 그에게는 ‘한국인은 술을 독하게 마신다.”정도의 선입견이 남았으려나.
중국인 여자는 휘청이고, 남자는 의식을 잃기 전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방에만 데려놓고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 “라는 자신도 믿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는다. 조지아인 아저씨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실 술이 늘어났으니 기쁜 대작의 시간이다.
착각이었다. 의지력의 중국인은 20분 후 돌아와 싱크에 담긴 자신의 잔을 씻고 다시 술을 청한다. 마실 사람이 늘어났으니 여전히 기쁜 대작의 시간이다.
밤은 깊어만 가고, 우리는 취해만 간다.
건배, 간베이, 가우마르조스.
잔은 돌고 돈다. 어느 하나가 끝내 쓰러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