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1: 팔도 도시락
무작위 한, 밤의 시간이다. 흐름을 짚어낼 수 없는 그 시간 속을 더없이 전형적이며, 때로는 작위적이기까지 한 여행자들이 살아간다.
거리의 가로등이 켜지고, 드문 지나가는 차 몇 대에 하얀 흙먼지가 일어 오늘의 인적을 지운다. 개가 짖고 달이 울면 어설피 쓰인 극만 같은 밤이 찾아온다.
먹을 게 떨어져 2, 3일 전 트빌리시에서 2라리, 한국 돈 1,000원을 주고 산 쇼티를 질겅질겅 씹었다. 화덕 가루 날려 겉은 꺼끌했어도 속은 촉촉했던 쇼티. 산바람을 쐰 탓인지 그저 쉰 것인지 그새 맛이 변해버렸고, 그제의 기억이 거짓부렁만 같다. 얇디얇아 윗니와 아랫니가 맞닿는 와중에도 질기긴 질겨 씹혀 끊기질 않는다. 이로 박스 테이프 끊는 듯한 질감과 혓바닥에 닿는 테이프의 맛과 같은 식감에 구역질이 나 절반 덜 되게 남은 빵을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지고는 저녁거리를 고민한다.
결국, 나는 철문을 열고 나가, 식당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슈퍼마켓으로 걸어가 저녁거리를 집어오고, 설산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다, 말 붙이는 다른 여행자와 잔을 부딪히게 될 것이다.
침대에서 오래도 뒹굴었을 저기 부엌의 중국인들은 조지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혹은 이미 동향 사람이 여섯이나 있는 판에 굳이 타향 요리를 사 먹을 이유가 없어, 삼삼오오 장을 봐왔을 것이고, 어떠한 볶음 요리를 해 먹을 것이며, 내가 돌아올 때 즈음이면 식곤증에 몸을 맡긴 채 몇은 방의 침대에 누워, 또 다른 몇은 부엌의 의자에 앉아있을 것이다.
단체 여행객을 받은 게 아닌 이상, 한 두 명의 새로운 여행자가 숙소를 찾았을 터이고, 개중 친화력이 좋고 영어를 사용하는 여행자라면, 이미 여럿이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저 무리에 비집고 들어가기보다는, 이어폰을 낀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양인의 평온을 깨뜨리기보다는, 근처를 두리번거리다, 휴대폰은 책상에 덮은 채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식사 중인 청년을 발견하곤 말을 건넬 것이다.
허기에 파란 철문을 열고 나가니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옆집 개를 깨운 모양이고, 아니나 다를까 시끄럽게 짖어댄다. 제 집이라도 끌고 나올 기세로 창살에 붙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먹어서는 안 될 것이라도 먹어본 걸까 억측하지만, 아무래도 과한 생각이다. 과한 건 내가 아니라 주르륵 떨어져 고인 침의 웅덩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지나치고 볼 일이다. 잰걸음으로 개집 앞을 지나친다.
그 옆을 지나쳐 어제의 식당을 찾으니 문은 잠겨 있고, 다른 식당 여럿 역시 그러하다. 무슨 날인가도 싶지만, 의문을 해소해 줄 사람은 없고, 읍내로 걸어간다. 개들이 짖고 뛰어 흙먼지가 인다. 흙먼지가 일어 내 발자국을 지운다.
마을 잔치라도 있는 듯 분주한 슈퍼마켓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건 비단 러시아어 적혀 수출된 팔도의 도시락뿐이 아니다
간이 정육점의 매대에는 돼지 앞다리살이 없고, 미국의 버드와이저, 터키의 에페스, 그리고 독일의 뢰벤브로이가 하나씩 사라져 있는 맥주 코너에는 설산을 로고로 삼아 빚어낸 맥주가 있어 눈길을 잡아끈다. 도시락 두 개, 콜라 하나를 집은 후 값을 치르고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다.
러시아 국민 라면이라던 팔도 도시락의 맛은 어릴 적 한국에서 먹었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콜라 역시 시원하고 달긴 하나 그뿐이라 특별할 게 없다. 산을 올려다 본다.
조지아의 와인을 넣은 것인지, 그윽한 포도향을 머금은 진한 동파육이 코를 간질인다. 잠시 온수를 받기 위해 부엌을 찾으니 중국인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끼니를 함께하고 있다.
눈길은 주지만 그 이상 반응하지 않는 그들에게 나는 완전한 타인이다. 다른 여행자라 한들 별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약간의 위안거리려나.
다만 눈을 반짝이는 여자 하나와 그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는 남자 하나의 시선은 내가 문고리를 덜컥이며 잡았을 때부터 컵에 물을 담아 부엌을 떠날 때까지 때로는 끊겼다 꾸준히 다시 이어진다. 어찌 됐건 저곳은 그들만의 세상이다.
라면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산을 바라보고 있기를 수십 분, 담배 문 아저씨 하나가 난간에 기대 질문을 던져온다.
"웨 유 프뤔?"
작위적인 대화 몇 마디가 오간 후, 내가 썩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아까 전부터 말없이 이어폰을 낀 채 담배만 뻑뻑 피워대는 저 서양인 여자에게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것인지,"조지아는 물이 좋아서 맥주가 맛있지. 한 번 들어보게나."라 말하며 맥주를 권해온다.
그의 말대로 조지아 하늘의 청록빛 푸르름을 담은 듯했던 맥주는 시원히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오늘 하루, 나는 종일 말이 없었다. 어제의 산행 이후 목이 건조해 말을 쉬이 뱉지 못했으나 맥주에 대한 보답으로 잠깐의 대화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잘댄다.
밤바람이 차고, 이에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까의 남녀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밝아지는 화색의 여자와 훼방꾼 보듯 눈을 내리까는 남자 하나. 끼어들 넉살은 없으나 벌써 맥주 두 캔을 비운 조지아인 남자는 거칠 것이 없고, 결국 넷은 합석한다. 전통 술을 가져오겠다며 퇴장하는 남자.
능선 너머 밤하늘이 드리운 조명이 무대를 밝혀오고, 걷힌 낮의 장막을 뒤로 조지아 산골 마을의 주방에 배우 셋이 앉아있다.
식탁을 잡고 의자를 끌며 중국인 여자가 운을 띄운다.
"웨어. 어. 유. 프람?"
늘 그렇듯. 짜기라도 한 듯 작위적이다. 피식. 실소를 억누르고 답한다.
밤의 막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