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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Oct 20. 2024

서늘한 온기

사소한 웃음. 행복.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도시. 리가.


사소한 것들에서 나는 북유럽을 읽는다.


이를테면, 대뜸 카드리더기부터 내밀고 보는 버스 기사 아저씨로부터, 또는 창백하게 하얗다 못해 투명한 사람들의 피부색으로부터.


(북유럽은 컨택리스 결제가 일반적이다)



< 버스의 아이들 >


5유로를 지불하고 버스에 올라 맨 뒷 좌석에 앉는다.


힐끗. 앞 좌석의 아이 넷이 나를 보곤 무어라 재잘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는데, 보아하니 셋이 한 명을 놀리는 모양이다. 말이 달라 통하진 않지만, 나도 경험한 적 있어 알 것만 같은 익숙하면서도 싱그런 웃음.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옆의 친구들은 웃고 놀리기에 바쁘다. 세상 무해한 웃음.


시선이 얽혀 마주 웃어주었더니 아이의 얼굴에 트라파니의 노을 같은 홍조가 번진다. 장난기가 발동한 난 버스에서 내릴 때 손까지 흔들며 내리고, 아이들은 또 한 번 환하게 웃는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정오가 다 지난 후에야 리가에 도착했고, 좁은 버스 창 틈으로 스미우는 바람은 여전히 서늘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은 따스해 왠지 나는 이 도시를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얀 흠 같은 구름이 펼쳐진 리가의 거리를 걷는다. 굳이 따지자면 모두에게 있는 그런 사소한 흠 같은, 사실 하얘서, 깨끗해서 아무래도 좋은.


이렇듯 리가의 청명한 하늘에는 구름이 적당히 드리워져 있고, 바람은 서늘하되 결코 차갑지는 않다. 나는 호스텔 체크인 시간까지 하릴없이 도시를 구경하며 나름의 휴식을 취한다.


그리스도 성탄 대성당의 황금 돔은 화려하다 못해 휘황찬란해, 진짜 금이 붙어있는 것만 같아, 잠시 올라가 조금이라도 떼올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눈길을 잡아끈다.


그럼에도 정작 사소한 것들에서 난 이 도시를 좋아할 이유를 계속 발견한다.



< 성당 옆 노부부 >


성당 건물 옆 자갈길로 빠져나와 노부부를 마주친다.


파란 셔츠에 라이더 재킷 같은 검은 블루종으로 멋을 잔뜩 부린 할아버지는 갈색 헌터캡과 알 큰 안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고, 할머니는 빨간 목도리와 버버리 코트로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길거리의 멋쟁이들이다.


두 손 꼭 맞잡은 채 서로의 보폭에 맞춰 그들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이미 무수한 세월을 함께 보냈겠지만 평범한 산책에도 꽃단장을 하고 나서는 세심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할머니는 이내 잠시 맞잡은 손을 놓고 건물 근처로 걸어가고 할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방에서 디카를 꺼내 무엇이 그리 신기하고 또 새로운지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돔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할머니. 그런 아내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아버지. 오랜 애정을 담아 바라본다.


사진을 다 찍은 후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멋쩍으면서도 수줍게 웃고, 이내 할아버지는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가 무도회의 신사가 레이디에게 춤을 청하듯 손을 건넨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노부부는 손을 맞잡고 다시 나를 지나쳐 걸어간다.



< 버거 축제 >


또 성당 옆의 공원에서는 버거 축제가 한창이다.


무슨 일이 있나 찾아도 보고 나중에 호스텔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도 보지만 어떠한 연유로 스무 개에 달하는 버거 부스가 공원에 들어서 있는지는 알 길은 없다.


버거 하나에 12유로. 비싸지만 스칸디나비아만큼은 아니라 내가 발트해에 있음을 상기해 주는 그런 가격.


눈 뜬 이후로 먹은 게 없는 데다 온 공원에 살짝 타버린 고기 냄새, 녹아내린 치즈 냄새가 가득해 입에 침이 고인다. 하나를 먹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흡입할 것만 같아 아쉽지만 육향으로 배를 채우고, 공원을 잠시 돌아보다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 호스텔 직원 >


아직 침대를 정리하지 못해 체크인은 어렵겠다고 말한 직원은 대신 호스텔 투어는 가능하다며 크다고 하긴 어려운 호스텔 구석구석을 소개한다.


열쇠가 많아서 미안하지만 퍼즐을 푸는 것 같지 않냐며 웃고, 우리 호스텔은 사과랑 물이 공짜인데 사과를 하나 가져다주겠다며 또 웃는다. 에어컨이 필요 없을 이 나라의 서늘한 온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내 말에도 환하게 웃는다.


가방을 맡겨두려 했더니, 그새 침대 정리를 마쳤다며 방으로 안내를 마친 후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웃는다.


리가의 사람들은 웃을 일이 많아 행복하겠다. 여기 있는 동안의 나도 덩달아 행복하겠다.


이불 밖은 서늘하고 이불 안은 따뜻해 솔솔 잠이 온다.



두 시간 동안 깨지 않고 푹 잔다.


바람이 코를 간질여 일어나는데 모든 순간이 바람 흐르듯 자연스러워 또 행복하다.


주섬주섬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고 리가 성베드로 성당을 향해 걷는다.



< 성당의 가이드 >


전망대에 올라 도시의 전경을 바라본다. 전망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가이드 역시 웃음이 많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한 것인지 목소리가 살짝 쉬어있다. 대뜸 관광객의 키를 물어보곤 첨탑이 27 관광객이라는 둥, 여기 해적의 무덤이 있는데 그건 알고 오셨냐는 둥, 또 첨탑이 기울고 있는데 피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빨리 찾아오시길 잘했다는 둥, 정말 1초라도 쉴 새 없이 말을 뱉는다.


"이제 우리는 첨탑의 끝에 도착해 가고, 3, 2, 1. 자.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밖에 계신 분들. 먼저 들어오시려고 한들 제가 태워드릴 건 아니니까 거기 그렇게 서 계시면 되고요. 저 어디 안 가는 건 아닌데, 다시 옵니다. 아. 한 분 정도 자리가 남는데, 혹시 일행? 일행은 아니시구나. 저기 남성 분. 에이 조금 무거우실 것 같은데? 와이프 놔두고 내려오시려고? 이해는 합니다만 내려가신 후도 생각하셔야죠. 그래요. 현명하십니다. 자 모두 박수. 그 옆의 남성 분.은 아니시고 그 옆의 여성 분. 축하드립니다. 저와 함께 내려가실 기회를 얻으셨습니다.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니에요. 아. 올라갈 때도 저였다고요? 내려가는 건 또 다릅니다. 혹시 내일도 오실 건 아니죠? 저 내일 여기 없습니다. 어차피 일주일에 삼일만 여기 옵니다."


마지막까지 혼을 쏙 빼놓는 입담으로 모두에게 웃음을 선물하고 본인도 웃는다.



전망대의 바람은 차고, 나는 새빨간 방송탑, 격납고 같은 중앙 시장, 그리고 무엇을 지향해 설계했는지 모르겠는 중앙도서관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구시가지의 브라스 밴드 소리.


한 해의 대부분을 추위와 함께 보내도, 이 도시의 사람들은 행복할 기회가 많겠다. 그 빈도가 잦겠다.



< 리가 올드타운. 구시가지  >


새로운 도시에 왔고, 그 도시가 좋아, 일부러 길을 잃는다.


정해지 목적지 따위는 없고 어디를 가도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손을 맞잡지 않아도 돌길을 같이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정겹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지나가는 어린아이와 사랑스럽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 역시 아름답다.



페포스 피자 가게 안의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든다.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웃음 짓게하는 유쾌한 소음이다.


< 옛 것들이 새 것들과 잘 어우러진 도시 >


광장 앞 아이들은 뛰놀고, 젊은 커플이 서로의 어깨를 내주어 편안히 쉬고 있다.


그 안온함에 나도 걸음을 멈춘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서늘한 바람에 실린 따스한 노래를 듣는다.



지붕 위의 고양이.


앙칼진 고양이에 얽힌 이야기 역시 사소하지만 재미난 웃음거리 중 하나.


길드에서 제명된 일로 앙심을 품은 건물주가 조합건물을 향해 똥을 싸지르는 듯한 모양으로 고양이를 달아놓았고, 소송과 협의 끝에 고양이 머리가 조합건물로 향하게 합의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녔다. 한참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럼에도 곁은 공백이라 떠올릴 건 두고 온 가족 뿐, 두고 온 한국 뿐이었다. 그래서 한식당을 찾았다.


쭈뼛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그을린 고추장과 볶아낸 간장의 향이 은은히 퍼져 있었다. 그 향은 마치 어느 일요일 오후, 아버지가 맛집이라며 데려갔던 기사식당에서 맡았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옅었다. 어딘가 덜 맵고, 어딘가 덜 단. 정구지가 빠진 국밥처럼, 어정쩡하게 비껴간 한국이었다. 


그뿐이었다. 냄새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이국적이었다. 북유럽 오두막 같은 의자들과 금발의 사람들, 그리고 엎어진 메뉴판에 적힌 라트비아어까지.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주섬주섬 챙기고는, 밖으로 나와 메뉴판에 코를 박았다. 주문을 마친 뒤 혼자 책장을 넘기며 끼니를 해결했다.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갓 부친 전과 불고기는 따뜻했다. 정은 아니더라도 온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따뜻함. 시린 속을 덥힌 나는 문득 생각했다. 서늘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지 않기는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버스에서 마주한 소녀의 미소, 손을 잡고 성당 앞을 걷던 노부부, 첨탑 위에서 유쾌히 말을 쏟아내던 가이드. 구시가지를 가득 채운 노랫소리와 지붕 위 앙증맞은 고양이 조각. 뜬급없는 버거 축제의 짙은 치즈향과 골몰골목 작은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들.


이렇듯 리가는 사소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런 소소한 시간의 조각을 마주하고 또 만끽하며 이 도시에 조금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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