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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May 16. 2023

장가가기엔 글러먹었다.

시에라 네그라, 노랑 이구아나

22. 12. 28: Day 13,


어떻게 천운이 내게 닿아 다행히도 시에라 네그라 투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오전 9시 정도에 등산을 시작해 오후 1시 30분에 묵고 있는 호스텔 혹은 선착장에 내려다 주는 그룹 투어.


총 등산 시간은 4시간 정도로, 지름이 장장 10km에 달하는 압도적인 분화구의 크기 때문인지 경사 자체는 여타 산들과 대비했을 때 비교적 완만했다.


가이드는 모든 관광객들을 뭉뚱그려 Chicos라고 부르는 흥 많은 수도 키토 출신 사내였고 (여자도 많지만 귀찮으니 Chicos로 통일하겠다나 뭐라나) 발걸음이 매우 빨랐다.


개중에는 내가 제일 젊었고, 또 빨랐기에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환경 보전과 파괴의 역설에 대한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가이드는 내게 갈라파고스가 가장 궁핍하면서도 풍요로웠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질문했고, 코로나19라 예상한 내 답이 맞아떨어졌다.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섬 주민들의 삶은 가장 궁핍했지만 오히려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다며...


다만 동시에 그가 내게 일깨워준 것은 갈라파고스 환경 및 생태계 보전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관광 수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상적으로는 관광객의 출입을 엄금하고, 주민들을 본토로 모두 이주시킨 채 자연의 위대한 자정 능력에 기대는 게 답일 수 있으나, 생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필연적으로 몇몇 종의 멸종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멸종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제공했다며 조소했다.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아니 애당초 답 따위는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멸종을 가속화한 존재에 기대야 종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현실과, 여타 종의 보전을 위해 그 존재가 섬에서 나가줘야 하는 현실이 충돌한다니...


UN 및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이 이뤄지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관광 수입이 늘어야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보전에 투자할 수 있다며, 섬 주민들 사이에서도 적정선이 과연 어디인가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섬에 조사단을 따라 같이 들어갔을 때 (순찰단?으로 활동한다고 한다.) 마주했던 자연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고 전하며, 내게 시간이 된다면 대기열이 많이 길긴 하지만, 자원봉사를 신청해 조금 더 섬을 둘러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해 분뇨를 다 들고 다녀야 하며, 분뇨를 통한 과일 씨앗 등의 전파를 막기 위해 최소 2주 간 섬에 체류해야 한다는데, 아마 못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관광객의 방문이 허락된 섬뿐만 아니라 여타 섬들의 실정을 자세히 알 수 있어서 꽤나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걸어 칼데라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2005년 분화 이후 용암이 굳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과거 분출 당시의 사진을 보여줬다. (듣자 하니, 안에 있으면 마그마, 밖에 나오면 용암이라고... 점성과 흐르는 성질로 용암을 판별한다고 한다.)


약간의 유황 냄새가 코 끝을 간질였고, 저 멀리 칼데라의 끝자락에서 피어 나오는 연기와 희끗한 노란 자국들이 화산의 활동과 황의 존재를 짐작케 했으나 전반적으로 풍경 자체가 삭막하기 그지없어 실망스러웠다.


'크다.'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 크긴 큰데... 그게 다다. >


칼데라를 지나쳐 쉼터에서 잠시간 휴식을 취한 후 (첫 시작 지점을 제외하고는 화장실이 없기에 다들 자연을 활용했다.) 현지인들이 Volcan Chico라고 부르는 화산의 자락을 보기 위해 다시금 움직였다.


과거 현지 어부들 혹은 사냥꾼들이 친근하게 불렀던 Chico라는 이름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지질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사실 Volcan Chico가 화산이 아닌 화산의 자락일 뿐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 공식적인 명칭은 화산 산자락 1 정도라고 가이드가 전해줬다.


다만 이러한 작은 명칭 하나하나에도 갈라파고스 사람들의 문화와 얼이 담겨 있는 법이라며, 투어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산자락 1이 아닌 Volcan Chico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광객 모두를 Amigo(친구)도 아닌 Chico(남자아이)로 부르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렇게 산자락을 걸어 내려가다 노랑 육지 이구아나와 마주쳤다.


육지이구아나와 바다이구아나가 교배해 태어나는 잡종 이구아나들을 제외하면, 갈라파고스엔 총 4개 종의 이구아나가 서식하고 있다.


우선은 바닷가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바다이구아나, 그리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나머지 3개 종.


그중 창백한 육지 이구아나(Pale Land Iguana)는 투어로만 방문 가능한 산타 페 (Santa Fe) 섬에 서식하고 있으며, 핑크 이구아나(Pink Iguana)는 이사벨라 섬에 위치해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울프 화산(Wolf Volcano)의 산자락에서만 발견되기에 (이마저도 불과 수년 전에 처음 발견되었다.), 실질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다 이구아나, 그리고 운이 억세게 좋다면 육지 이구아나까지였다.


가이드 역시 자신도 투어를 진행하면서는 올해 들어 1번밖에 못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 장가가기엔 글러 먹었다. >


다만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슬픈 사실 하나를 알려줬는데 그건 바로,


근처에 암컷이 없기에 수컷도 없다는 것...


달리 말하면, 지금 저 이구아나는 번식에 있어 경쟁자가 없는 현 상황에 꽤나 만족하고 있을지 모르나, 경쟁자가 없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올해는 장가가기엔 글러먹었다나…


이구아나 욕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이드의 농담에 신나게 웃어댔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섬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올라 점심을 해결했다.


광활한 대지와 삭막한 풍경 속에 수많은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숨겨져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고, 스타워즈 혹은 화성에서나 볼 법한 풍광은 그 대비를 더욱 강화시켰다.


갈라파고스 여행의 끝자락에서, 저 멀리 아득히 늘어선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는 뿌듯함과 언제 다시 올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고, 그런 내 마음을 달래주려는지 선선한 바람이 나를 간질였다.


하염없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려갈 때까지 바위에 걸터앉아 갈라파고스의 풍경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다시 오겠노라 다짐하며...


< 뭐랄까, 화성 같다 >


내려오는 길에는 화장실이 급해 (난 아직 본능에 굴복해 자연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제일 마지막에 출발해 제일 빨리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바위니 뭐니 무시하고 산을 질주하며 뛰어내려 가던 나를 미친 사람 마냥 쳐다보던 시선들이 기억난다.


< 길이 뭔가 예쁘다. >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선착장에 가 배를 잡아타 다시 산타 크루즈 섬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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