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키아
섬.
섬은 하나의 유리된 세계다.
육지, 산골 마을의 사람들은 자연을 경외하거나 정복하는 수밖에 없다. 달 지기 전 이른 새벽, 수탉 울음에 일어나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반면, 섬사람은 그저 그날 바다가 내어준 몫을 받아들일 뿐이다.
물론 섬사람도 때로는 바닷사람이 된다. 먼 바다로 나가 그물과 씨름하고, 때론 몰아치는 태풍에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섬사람은 그들의 세계가 준 것을 받으며 살아간다. 밭을 가꾸고, 가축을 치고, 짐승을 사냥하는 산사람은 늘 무언가를 지키고 빼앗아야 하는 운명을 마주한다. 하지만 그와 달리, 섬사람은 수동적이기까지 한, 강요된 느긋함 속에 살아간다.
단절.
섬은 또한 단절이다. 푸에르토리코. 갈라파고스. 니카라과의 오메테페와 포르투갈의 아조레스, 마데이라. 몰타와 키프로스. 스웨덴의 섬과 암초들과 시칠리아. 이 모든 섬을 여행하며 나는 혼자였다. 꿈에 그리던 신혼여행지, 카리브해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이러다 몰디브도 혼자 가겠네' 생각했지만, 이미 칸쿤은 혼자 다녀왔으니 못할 것도 없겠다는 외로운 자괴감이 저기 푸른 바다 가둔 만의 파도에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집밖으로 나와 펼쳐진 만을 바라보며 애꿎은 돌멩이만 이리저리 발로 건드렸다.
군도와 제도. 섬 속의 섬. 세인트 빈센트 섬의 부속 베키아 섬으로도 혼자 떠났다. 그나마 어제는 M과 같이 입도했으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던가. 존재 이후의 부재는 더욱 아렸다. 고독과 분리는 섬이라는 공간이 던지는 커다란 물음이자, 여행의 그림자였다.
정체성.
결국 섬은 섬이었다. 부서진 돌덩이와, 낮은 아스팔트 도로와, 되는 대로 자라난 풀떼기, 산 중턱에 규칙 없이 박혀 있는 주택을 보고 나는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섬의 풍경을 보여주니 그는 수천 킬로 떨어진 카리브해의 섬이 고향 근처의 가덕도와 다른 게 없다 말했다.
물이 있고, 물가에는 바위 혹은 모래가 되는 대로 널부러져 있는 섬은 섬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모두 다르지만, 뭉뚱그려 보면 유리된 하나의 세계는 닮은 구석이 많아 각자가 각자의 빛바랜 열화판 같았다.
그렇다면 섬사람은 무엇인가. 정박 후 다시 떠나가지 않고 정착한 사람들을 섬사람이라 부르는 것인가.
여행의 이유.
그간 여행의 이유를 묻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 내게 여행의 이유를 물은 것은 지금 전화를 받고 있는 친구였다. 2년도 더 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저 즐겁다고, 이유를 찾고 만들어 내서 합리화해야 하는 것부터가 너무 한국적이며,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하는 답변을 했다.
전화를 끊으며 친구는 일상을 살아가자고, 그리고 나는 여행의 순간순간처럼 일상을 살아내자고 말했다. 단순히 일상을 사는 것과 여행의 순간순간처럼 일상을 살자는 다짐의 차이는 같은 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멀어졌다. 나는 일상을 여행의 모조품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매 주말마다 다른 국가로 떠나는 호사를 누리며 보다 답에 가깝다고 느낀 건 '정착하고 싶은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 남미를 여행하며 보다 구체화된 여행의 이유는 근원적인 물음에 맞닿아 있었다.
'사람은 왜 떠나는가.'
기약할 수 없는 출도.
그 누구보다 머무르고 싶어 떠나는 게 방랑의 기만적 역설이다. 다음을 그리고픈 나는 하얀 요트의 갈색 돛대가 세찬 바람에 꺾이기를 바라며 기약할 수 없는 출도를 꿈꾼다.
이미 떠나온 시점에서 도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했고, 산사람, 섬사람보다는 대해를 주유하는 바닷사람에 가까워졌으니 어디든 닻을 내리고 정박, 아니 정착하고픈 마음이 컸던 것 아닐까.
어제의 크루즈도, 언제부터 정박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요트들도 그대로 떠 있지만, 사람에도, 장소에도 정착지 못한 여행자는 이만 전화를 끊고 뒤로 멀어져 가는 섬을 바라본다. 바닷새와 바닷사람은 모두 바다에 발을 내리지 못하는 존재들이고, 육지가 보이기 전까지 날갯짓해야 하는 존재들인가.
저 멀리 킹스타운 항이 가까워진다. 유리되었던 세계는 사라지고, 사람 북적이는 낮의 도시가 펼쳐진다.
야자수와 컨테이너의 대비가 새롭다. 앞에 보이는 건 육지가 맞지만 또 다른 섬 속의 육지이다.
그렇게 나는 섬을 출도해 섬에 도착했다. 시작만 겨우 더듬을 수 있는 기약 없는 여정의 끝이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이 어떠한 함의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내가 계속 출항하고 잠시 닻을 내렸다 다시 출항할 뿐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닻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다니며 썩어가는 텅 빈 나룻배처럼, 관성적으로.
바닷새는 육지가 보이기 전까지 날갯짓을 멈추지 못한다. 바닷사람은 육지가 보이기 전까지 노를 저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 역시 정착하기 전까지 계속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정착하지 못할 방랑자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나는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해 기약 없는 것이 아닌, 더 이상 떠나지 않아 기약할 수 없는 출도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