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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Mar 01. 2018

아침 사세요, 아침.

남의 집 아침 / 삶의 평범한 권태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둔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전에는 다이아몬드 제품을 좋아했지만.
그건 우리가 오하이오 블루 팁 성냥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훌륭하게 꾸민, 견고한  
작은 상자들로 짙고 옅은 푸른색과 흰색 로고는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마치 세상에 더 크게 외치려는 것 같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4cm의 매끈한 소나무 막대는  
머리에 거친 포도색 모자를 쓰고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래도록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줄지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다시없을 불꽃을,
이 모든 걸 당신께 드립니다."

그 불꽃은 당신이 내게 주었던 것, 난  
담배가 되고 당신은 성냥이 되어, 혹은
나 성냥 되고 당신은 담배 되어
키스로 함께 타올라 천국을 향해 피어오르리

[출처] 패터슨의 시|작성자 타자 치는 Snoopy 
(https://blog.naver.com/nicemonk/221215388262)


패터슨 시의 버스 기사 패터슨씨의 일상은 단순하게 짜임새 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시리얼을 먹는다. 출근한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시를 쓴다. 버스를 운전한다. 버스 운전석에서 들리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버스를 운전한다. 퇴근한다. 아내와 이야기한다. 저녁을 먹는다. 시를 쓴다. 개와 산책한다. 맥주를 마신다. 시를 쓴다.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의 단순함과 반복 속에서 패터슨의 시가 탄생한다. 사뭇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의 모습이 담긴 영화 <패터슨>에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 일상에.


삶의 평범한 권태를 사랑해야 한다.

조효원, <다음 책> (문학과 지성사) 표지 뒷면 중.


그리고 여기, 'Ohio Bluetip Matches'로 시를 쓰는 패터슨처럼 아침에 일어나 단순하게 짜임새 있는 하루로 아침을 채우고, 아침을 쓰는 사람이 있다. 매거진 'Achim'의 에디터이자 발행인이신 윤진님이다.


"회사를 나오고 싶어서, 아니, 회사를 퇴사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잠시 바람이 쐬고 싶어서 오후 반차를 쓰고 회사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책방에 들렀어요. 거기서 집은 책이었어요. '읽을 수 없는 시간들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있는데, 이때 너무 바쁘고 힘들었거든요. 책 읽을 여유도 없었고." (윤진)


마침 책은 '삶의 평범한 권태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윤진님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이 책에서 말하는 '삶', '평범', '권태', '사랑'이 함께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던가. '권태'와 '사랑'이 어울릴 수 있는 말이었나... 그런데 영화 <패터슨>에 매력을 느낀 사람이라면, 윤진님의 아침에 감탄한 사람이라면 '권태'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집 프로젝트 - '남의 집 아침'



윤진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남의 집 프로젝트> 덕이었다.
그중에도 '남의 집 아침'을 통해 2018년 3월 1일 아침, 윤진님을 만났다.


남의 집 프로젝트는 '남의 집 거실에서 집주인의 취향을 나누는 낯선 이들의 커뮤니티(네이버 예약 소개 중)'다.


이 프로젝트에 게스트로 처음 참여한 것은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님이 호스트였던 '취향의 넷플릭스'라는 프로젝트에서였다. 넷플릭스를 보지 않지만,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님도 궁금했다. 그렇게 참여한 '취향의 넷플릭스'는 사정상 호스트의 집에서 열리진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다. 이후에도 줄곧 오픈되는 남의 집 프로젝트의 주제를 보고 있었다.



아침을 잠이 아닌 것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그게 글이라면 좋지 않을까.


매일 아침을 잠으로 채우고, 또 자고, 그러다 자고, 힘겹게 일어나서 힘겹게 집을 나서는 패턴이었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아침을 잠이 아닌 것으로 채우고, 마침 그게 글인 호스트가 '남의 집 아침'에 소개되고 있었다. 참여신청 버튼을 눌렀다.


시리얼을 먹다


패터슨은 아침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는다. 윤진님도 아침에 시리얼을 먹는다. 윤진님의 초대를 받은 우리도 시리얼을 먹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종류의 콘XXXX, 코XX 등의 시리얼이 아닌, 여러 종류의 맛과 모양을 가진 시리얼이었다. 베이스가 되는 시리얼에 그레놀라나 뮤즐리를 섞어서 먹는 방법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애초에 그레놀라와 뮤즐리를 알지 못했다. 씹는 식감이 독특했던 볏짙 모양의 블루베리 맛 시리얼에 레몬향이 가득 베인 그레놀라(뮤즐리였던가)를 배합해서 아몬드 브리즈를 넣어 먹었다. 다른 맛을 보려고 한 그릇을 더 만들다가 배가 조금씩 불렀다. 시리얼도 천천히 맛을 느끼며 먹으니 배가 부르는 모양이었다. 호랑이 기운은 큰 그릇에 가득 붓고 설탕 우유까지 모두 마셔야 배가 불렀는데 말이다.


윤진님은 미국에 1년간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시리얼의 다양한 세계를 접하고, 각종 시리얼을 하나씩 사고, 먹고, 포장을 모았다. 400여 개의 포장이 본가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시리얼에 대한 소개를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기도 해서, 그걸 보고 시리얼에 대해 묻는 사람이나 시리얼을 촬영에 사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종종 받기도 했다. 윤진님이 발행하는 매거진 'Achim'에도 시리얼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다.


시리얼은 윤진님의 소중한 아침 식사였다. 흔히들 우리는 아침은 바쁘고, 아침식사를 챙겨 먹기 힘들기 때문에 간단히 떼우기 위함으로 시리얼을 먹는다. 그 때문인지, 시리얼이 '소중한' 아침 식사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곁들여진다면, 시리얼도 충분히 배부를 수 있는 '소중한' 식사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침의 여유가 필요했다.


어떤 '섬 같은 곳'



'작업대'라고 부르는 윤진님의 테이블은 목공소에 의뢰해서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윤진님은 아침에 일어나 묵상도 하고, 테이블 옆에서 요가도 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글을 썼다. 시리얼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 사이에 미묘하게 바뀌는 창 밖의 색 변화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찰나라 했다.


어떤 섬 같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섬에서 햇살을 받으며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섬 같은 곳'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잠자리와는 떨어진 곳, 어딘가에도 막히지 않은 곳. 나의 방은 침대 바로 옆이 책상, 책상은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마 어느 인테리어 전문가가 가장 효율이 높은 부엌 싱크대 구조는 '섬' 모양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계기로 나의 공간도 '섬'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 그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윤진님은 테이블은 내가 생각하는 '어떤 섬 같은 곳'이었다.


5분간의 유토피아, 아침에 듣는 개소리.



남의 집 아침을 찾은 게스트 중에는 어제에 이어 오늘 이틀간 아침에 만난 분이 있었다. '왈이의 아침식땅' 대표님이신 영은님이었다. 어제는 테헤란로 커피클럽에서, 오늘은 남의 집에서. 신기하고 반가운 인연이었다.



호스트이신 윤진님의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게스트들의 '아침'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때 출근길 유토피아를 바라며 5분짜리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시는 영은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와 함께 '왈이의 아침식땅'의 한 방송도 들을 수 있었다. 오디오 속 이야기와, 곁들여지는 음식 소리가 윤진님의 집에서 여유 있게 어우러졌다. 그 회차의 음식 소리는 전자레인지에 호빵을 돌리는 소리 '띵~!'


왈이라는 나이 지긋한 멍멍이가 운영하는 아침 식당을 들리는 손님과의 대화와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가 마치 오늘 아침 '남의 집'에서 호스트가 내주시는 차와 먹을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랑도 비슷한 듯했다.


아침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게스트도 있었고, 일주일 전 퇴사를 하며 고민을 벗어던지고 여유를 찾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게스트도 있었다. 여기에 대한 호스트의 생각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이 아침에.


.

.

.

'띵~!'


향기, 음악, 아침 햇살.


첫 번째로 참여했던 '취향의 넷플릭스'와 오늘 참여한 '남의 집 아침'의 차이는 호스트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호스트의 집과 집이 아닌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게스트가 발견할 수 있는 호스트의 향기가 달랐다. 아무래도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소하게 보이는 책들이나, 물건이나, 집의 인테리어 같은 것들에서 호스트에 대한 향기를 느꼈다. 향기 짙게 베인 것들에서 게스트는 새로운 궁금증이나 공감을 찾았다.


한 게스트는 '최애 향수'를 사용하는 윤진님을 보며 기쁨의 돌고래 소리로 공감했고, 윤진님께서는 올리브 오일을 소개하며 손등에 조금씩 발라주며 화답하기도 했다. 그 향이 한참이 지나 밤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향뿐만 아니라 호스트가 선정한 음악이나 집에 비치는 햇살의 변화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스피커에서는 호스트의 취향이 그대로 담긴 플레이리스트가 그대로 흐르고, 햇살은 스물스물 비쳤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아침에는 아무런 소리도 켜지 않은 채로, 자판을 두드린다는 윤진님의 말에는 조용히 그 소리를 상상할 해 볼 수도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닥.


매거진 'Achim'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는 윤진님의 잡지를 선물로 받았다. '매거진 Achim'은 윤진님과 윤진님의 언니와 아는 오빠, 아는 동생 등 지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독립잡지였다. 모두 본업을 따로 있고, 사이드 프로젝트로 잡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에 주로 쓴 글들로 이루어진 '아침'이라는 잡지.


회사 일이 아니면 '아침' 일을 하는 윤진님의 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잡지였다. 잡지의 모습윤진님의  비슷했다. 정갈했고, 여유로웠다. 아기자기했지만, 가득하기도 했다. 포장을 받은 채로 유지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뜯다가, 꼼꼼하게 발린 풀 때문에 포기했다. 펼쳐 든 잡지는 신문 한 장 정도의 크기였다. '샤워'를 주제로 쓰인 한 호의 글들을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잡지 한 권을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음에 감탄했다. 이 잡지는 '아침'이라는 취향을 좋아하는 사람이 방문할 지도 모르는 취향관에 두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사세요, 아침.


일상이 아침 같았다. 새벽과 아침의 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준비된 상태로 집을 나서는 호스트의 일상이 곧 아침인 듯했다.


나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그런 아침이었다.


윤진님은 그런 아침을 살고 있었다.

이런 평범한 권태의 여유를 사랑하고 있었다.


'삶의 평범한 권태를 사랑해야 한다.'


윤진님의 아침을 경험하며, 비슷한 아침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성낭팔이 소녀처럼 파는 성냥 같은 건 아니지만, 살 수 있다면 이 아침을 사고 싶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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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사세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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