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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9. 2019

결을 만드는 시간 / 제곱

자연의 모든 것에는 '결'이 있다. 물결, 바람결, 모래결. 그런 물을 마시고, 바람을 쐬며, 모래를 디뎌서 그런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에도 '결'이 있다. 나뭇결, 머릿결, 살결. 결이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자연스러움의 증거가 되니 말이다. 


결국 음식 이야기를 할 거면서 너무 거창하게 자연을 들먹이며 시작한 것 같다. 항상 '결'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어머니가 장조림용 홍두깨살을 삶아서 결대로 찢는 모습이다. 마늘, 양파, 후추를 넣고 팔팔 끓는 물에 홍두깨살을 넣어, 수시로 물에 떠 오르는 거품을 거둬내며 푹 익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고는 건져내어 아직 채 식지도 않은 고기를 결대로 쭉쭉 찢으신다. 그 때문에 아직도 장조림을 먹을 때면 얇은 장갑을 끼신 채로 손에 불어가며 고기를 찢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얼마나 뜨거우셨을까. 그렇게 자연에서 새겨진 결은 어머니에 의해 새로운 결이 되어 나에게로 왔다.


자취를 하며 직접 요리하다 보니 결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느끼게 됐다. 그냥 날이 든 칼로 자르면 간단한 걸 식감을 위해 결대로 자르거나 찢다 보면 음식을 하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갑절은 더 든다. 준비하는 시간은 오롯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시간이다. 나 혼자 먹는 음식은 식감이 뭐가 중요하랴. 그냥 간편함이 일 순위다. 나만을 위한 음식에 귀찮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간혹 혼자 사는 분들이 이것저것 준비하며 근사하게 요리해 먹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어머니들처럼 3, 40년 동안이나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들은 오직 당신들의 가족들이 더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뜨거운 고기를 맨손으로 쭉쭉 찢는다. 사실 장조림 고기를 결을 살려가며 손으로 찢든, 결 반대 방향으로 칼로 자르든 크게 차이는 없다. 어차피 간장양념에 푹 끓이다 보면 간장이 베어 들어가는 것은 같기 때문이다. 급식 아주머니들이 해주시던 큐브 모양의 장조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칼로 두껍게 잘라낸 고기를 사용해도 속까지 양념이 밴다. 하지만 그분들이 급식 아주머니에서 한 가정의 어머니로 돌아가 가족들이 먹는 장조림을 만들면 그 맛이 달라진다. 이상한 일이다. 어차피 들어가는 재료나 요리하는 과정은 같은데 말이다. 무엇이 맛의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가족들을 생각하며 고기를 찢는 어머니의 시간이 들어가서가 아닐까. '정성만큼 맛있는 조미료는 없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모든 것에는 '결'이 있다. 물결, 바람결, 모래결. 자연이 오랜 세월을 들여 그 결을 만든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연 또한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라면 그 무수한 시간 동안 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머니라면.


by. 제곱 / 2월 2주차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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