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라이세이 Nov 09. 2019

숟가락은 맛있다. / 에라이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숟가락은 맛있다. 밥그릇 벽을 타고 움푹 패인 곡면 위로 쌀을 들어 올리면, 숟가락 가득 차오른 밥을 입 안으로 집어 넣으면, 숟가락은 맛있다. 입을 가득 채우는 숟가락의 느낌. 사람들이 이 숟가락 맛을 잘 모르는 건, 다름 아닌 젓가락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숟가락 맛을 알지 못했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지 않았으니까. 젓가락으로 밥그릇 바닥에 붙은 밥 한 톨도 다 집어 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숟가락으로 밥을 먹지 않았다.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을 먹는 줄 알았다. 젓가락질은 어른의 상징이었으니까. 젓가락질 잘 해야만 어른이라 생각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젓가락질만 했다. 숟가락은 국물이 아니라면 쓸 일이 없었다. 나는 젓가락질을 잘 하니까, 젓가락으로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숟가락 맛을 느낄 수 있을리가.


젓가락으론 밥도 먹을 수 있고, 반찬도 집을 수 있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퍼고, 밥그릇 위에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집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고, 숟가락으로 퍼올린 밥 위에 반찬을 올리고, 젓가락 놓고, 숟가락을 집고, 입 안으로 들어 올리면, 길다. 복잡하다. 그런데 젓가락으로는 밥을 퍼서 입에 넣고, 반찬도 집어 입에 넣는다. 끝. 젓가락이 더 단순하다.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젓가락질을 했다. 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TV를 보는데, 밥을 먹을 때 밥만 먹는 배우를 보았다. 밥을 먹을 때 휴대폰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밥을 먹을 때 TV를 보는 것도 아니고, 밥을 먹을 때 잡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었다. 그 배우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맛있어 보였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밥을 퍼먹어 봤다. 나도.


입 안 가득 밥맛이 채워졌다. 움푹 패인 숟가락 모양대로 입을 움직였다. 숟가락에서 밥이 사라지며 입술은 숟가락의 곡면을 훑었다. 숟가락 맛이 났다. 밥을 먹는데 숟가락 맛을 느꼈다. '아, 이거 숟가락 맛이구나.'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니 조금 여유로워졌다. 급하게 다시 젓가락질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젓가락을 쓰려면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그 덕에 밥맛이 느껴졌다. 숟가락 곡면을 한 번 훑으면 입 안 가득 밥으로 채워졌다. 숟가락이 맛있었다.


급하면 얼마나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숟가락질 할 시간에 젓가락질 해서 얼마나 더 시간을 번다고 그랬는지 젓가락질만 했다. 밥이나 반찬이나 할 것 없이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밥에 반찬을 곁들이는 게 아니라, 밥을 집고, 반찬을 집고, 그저 집었다. 그리고 입으로 채워 넣기. 그러다 숟가락 맛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으로 가득 밥을 퍼서 입에 머금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곁들인다. 숟가락은 숟가락대로, 젓가락은 젓가락대로 각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유독 숟가락이 맛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숟가락 맛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숟가락은 맛있다. 사람들이 숟가락이 맛있는 걸 잘 모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젓가락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숟가락 맛을 느끼고 싶다면, 어렵지 않다. 밥은 숟가락을 퍼고, 반찬은 젓가락으로 집는다. 숟가락으로 퍼올린 밥을 입에 넣는다. 그 곡면을 따라 훑는다. 반찬은 그 이후에. 지금까지 젓가락을 밥을 집어 먹은 당신. 숟가락 맛을 알게 될 것이다.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by. 에라이 / 3월 4주차에 작성됨.

이전 02화 1인분 어치의 삶 / 에라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