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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9. 2019

회사는 취미로 다니기로 했다 / 에라이

회사 탈출에 실패했다. 고작 입사 한 지 1-2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부터 탈출을 결심했고, 3개월 차에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입사 4개월 차, 탈출에 실패했다. 2019년 상반기에 원서를 제출한 2개 회사 모두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회사에 남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인턴 2명이 나갔고, 업무는 더 쌓였다. 이미 쌓인 업무 탓에 다른 팀의 원성을 사고 있을 때였다. 내가 맡은 업무는 아무리 제대로 처리해도 시스템이 내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직 1월 치 데이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장표를 수없이 돌려봐야 했다. 엑셀 숫자더미. 다른 팀의 동기는 나와 같은 팀이었다면 벌써 퇴사했다고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탈출구 없이 탈출할 생각은 없기에 회사 탈출에 실패했다. 나는 회사에 남았다.


그리 나쁜 회사는 아니다. 회사 밖에서는 '신의 직장'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 회사다. 나도 회사에 지원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최종 합격을 하고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도 몰랐고,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제대로 교육해준 적은 없지만 매일 걸려오는 수 십, 수 백 통의 전화에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입사하자마자 과장은 병가에 들어갔고, 그 업무는 고스란히 수습 직원인 나에게 떠맡겨졌다. 남은 팀장과 과장은 매일 12시가 지나야 집으로 돌아갔다. 같은 팀에 배치 받은 동기는 엑셀을 할 줄 몰랐고, 모든 엑셀 업무는 나에게 배정되었다. 3개월쯤 지났을까, 새로운 인사 발령이 났는데 성희롱으로 징계를 받은 차장이 우리 팀으로 오게 되었다. 병과를 마치고 돌아온 과장은 바로 옆자리로 돌아왔고, 어차피 다른 팀으로 옮길 생각으로 인턴이 하던 업무를 받았다. 하지만 사사건건 내 업무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팀장은 회의를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업무를 받아왔다. 쓰레기 처리장. 팀이 쓰레기 처리장이 된 것 같았다.


그런 팀으로 매일 출근을 했다. 출근하는 날 아침이면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탈출을 결심했고, 2곳의 회사에 입사 원서를 냈다. 그중 한 곳에 면접을 보러 갔지만 면접 전 이틀 동안 12시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면접에서 횡설수설하다가 떨어졌다. 나머지 한 회사는 인적성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나락에서 떨어지자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바로 지금의 팀.


쓰레기 처리장이었지만 나는 쓰레기가 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기에 회사의 업무는 복사 붙여 넣기의 반복이었다. Ctrl+C, Ctrl+V. 키보드로 글자를 치는 일은 PC 카톡을 할 때가 고작이었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던 나였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래서 회사 밖에서 글 쓸 일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지금의 <에쎄이비아, 칼럼비아>. 


회사 업무가 '주'였고, 이 글쓰기는 '부'였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회사 밖에서 하는 일을 '주'로 하고, 회사에서의 업무는 그냥 취미로 하는 '부'로 생각하기로. 평일에 취미로 회사에서 Ctrl+C, Ctrl+V만 하는데 월급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취미로 생각하니 월급이 적지 않았다. 아등바등하며 직장에서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차피 이건 취미니까. 그냥 정해진 시간동안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회사는 취미로 다니기로 한 것이니까.


by. 에라이 / 4월 3주차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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